CHAPTER 5. 떠난 자와 남은 자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때 그 검사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중략)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초임 검사들이 하는 '검사 선서'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공익의 수호자'가 되길 다짐한 검사들이지만 검사 본인이 사건 당사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10년간 관보에 게재된 법무부 징계 검사(전수)와 1988년부터 2016년 10월 현재까지 각종 사건·의혹에 연루돼 언론에 거론된 검사는 약 160명(행정소송 결과 징계가 취소된 경우는 제외).

이들 사례를 분석해 보면 시대ㆍ세대별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 주범으로 수배 끝에 검거되는 김태촌(가운데 정면을 보는 인물)과 부하들 [중앙포토]

‘범죄와의 전쟁’시대
근묵자흑(近墨者黑)형

1980~90년대 강력부 검사들은 조직폭력배나 마약사범 수사를 많이 했다.

이에 반발한 조폭이 검찰 지청장 관용차를 부술 정도였다. 한 마디로 ‘범죄와의 전쟁’ 시대였다. 이 와중에 검사가 ‘적군’인 범죄자들과 친분을 맺는 일도 종종 있었다.

1986년 검사 청부피습 의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조직폭력배 김태촌의 부하들이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을 습격해 중상을 입혔는데, 배후에 박 모(당시 51세) 부장검사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부장검사는 피습당한 호텔 사장에게 빚이 있었고 김태촌과는 친분이 깊었다. 하지만 검찰은 박 부장검사를 무혐의 처분했다. 징계도 하지 않았다. 김태촌과 부하들만 징역을 살았고, 박 부장검사는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 사건 10여 년 뒤 김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박 부장검사가 살인을 청부했다”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이를 부인했다.

1990년 조폭 두목 전과 누락 사건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인천지역 거대 조폭 두목인 최태준이 검거됐는데, 1심에서 의외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 담당 김 모(당시 39세)검사가 전과 12범인 그를 초범으로 기록한 탓이다. 이 사실은 최 씨가 또 범죄를 저질러 다른 검사의 수사를 받던 중 드러났다. 검찰은 이 사건을 김 검사의 단순 과실로 보고 감봉 처분만 내렸다.

같은 해 김모(당시 36세) 검사가 파친코 업자와 룸살롱에 합석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었고, 1994년 안모(당시 36세) 검사가 구속된 마약 피의자에게 돈을 빌려 수사비로 쓴 사건도 있었다.

검사가 강력사범과 연루된 사건은 ‘범죄와의 전쟁’이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 이후 사라졌다.

“나 대한민국 검사야”
권위주의형

검사가 지나치게 권위를 앞세우다 문제를 일으킨 경우다. 주로 20~30대 혈기 넘치는 젊은 검사들이 경찰과 다툼을 벌였다.

1993년 박 모(당시 27세) 검사는 사건 조서가 잘못됐다며 담당 경찰관(당시 47세)에게 주먹질을 했다. 피의자가 지켜보는 앞에서였다. 폭행 당한 경찰관은 사표를 던졌고 동료 경찰들은 근무를 거부했다. 문제가 커지자 박 검사는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다. 하지만 3년 뒤 검사로 재임용됐고, 현재도 재직 중이다.

1995년 조 모(당시 35세) 검사는 사건 조사 중 경찰을 폭행했고, 같은 해 송 모(당시 28세) 검사는 경찰에게 폭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검사가 술자리에서 '사고를 친' 경우도 많았다. 1998년 주 모 검사(당시 40세)는 당시 전북도지사와의 회식 자리에서 술병으로 도지사 비서실장을 때려 전치 4주의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주 검사가 받은 징계는 감봉이 전부였고, 뒤에 국회의원 배지도 달았다. 앞서 1990년에는 부산지검 30대 검사들이 룸카페에서 술을 마시다 주민 제보로 단속 나온 경찰을 때려 언론 도마에 올랐다.

권위주의 시대가 저문 2000년대 이후에는 검사가 경찰이나 다른 공무원을 함부로 대해 일어난 문제는 드물다. 하지만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2014년 의정부지검의 김 모(당시 36세) 검사는 50세 경찰관이 구속영장신청서를 제출하자 "이걸 수사라고 했느냐"며 찢어버렸다. 경기경찰청이 의정부지검에 항의했고 언론에도 보도됐다. 김 검사는 법무부 징계 뿐 아니라 공용문서 손상 혐의로 기소돼 형사 처벌(벌금 200만원 선고)도 받았다. 검사가 경찰을 폭행해도 형사 처벌 없이 넘어갔던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다.

‘내가 곧 정의다’
자기확신형

사건을 해결하려는 검사의 의욕과 정의감이 ‘내 판단이 옳다’는 과도한 확신과 잘못 만나 수사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른 경우다. 한창 열심히 일하는 30대 중반 검사들에게서 많이 나타난 유형이다.

1994년 안 모(당시 36세) 검사는 마약복용 혐의자를 연행해 조사하다 폭행해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범죄 혐의는 찾지 못했고, 피해자의 언론 제보로 폭행 사실이 알려졌다. 안 검사는 당시 마약사범 검거 실적 면에서 전국 최고로 손 꼽히는 검사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지방청 전보 처분과 감봉 징계를 받았다.

2002년에는 서울중앙지검 수사관들이 살인 혐의로 조사받던 폭력조직 부두목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폭행 수사관들은 물론 담당 검사(홍경령, 당시 37세) 도 폭행 공모·방조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받았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사건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검찰 조직을 위한 희생양'이라는 논란도 일었다. 당시 검찰에는 피의자 자백에 의존해 수사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런 조직적 문제를 검사 개인에 떠넘겼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건에 연루됐던 다른 검사들과 형평성 문제도 제기됐다. 앞서 1995년 송 모(당시 33세) 검사는 수사 중 피의자를 직접 폭행했지만, 형사처벌 없이 경징계(견책)만 받았다. 송 검사는 1997년 의정부 법조비리 때 변호사에게 향응을 받은 사실이 적발됐지만 역시 경징계로 넘어갔고, 2005년 브로커 김홍수에게 8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뒤에야 옷을 벗었다. 그는 2008년 대법원 유죄가 확정됐지만, 2010년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아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몰카 사건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도훈 전 검사(왼쪽). 오른쪽은 양길승 전 청와대 부속실장 [중앙포토]

2002년 서울중앙지검 피의자 사망 사건 이후 검사의 피의자 폭행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의 왜곡된 정의감과 자기확신은 다른 형태의 불법 행위로 나타났다.

2003년 '몰카 검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3년 청주지역 나이트클럽 소유주 이원호의 살인교사 혐의를 수사하던 김도훈(당시 36세) 검사는 이씨가 정치권 고위 인사의 비호를 받는다고 의심했다. 그는 증거를 잡기 위해 다른 사건의 피의자를 시켜 이씨가 고위 인사를 만나는 모습을 '몰카'로 찍게 했다. 자신에게 협조하면 본인 사건을 선처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김 검사는 촬영·녹음한 파일을 방송사에 보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불거진 게 노무현 정부 초기를 흔든 '양길승 청와대 부속실장 몰카' 사건이다.

김 검사가 이 사건의 배후라는 사실은 특검 수사 결과 드러났다. 하지만 김 검사는 국정감사와 특검 출두 때 웃음을 띨 정도로 자기확신에 가득 찬 모습을 보였다. 그는 총선 출마를 꿈꾸기도 했지만 2004년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2심에서는 징역 2년 6개월로 감형됐고 2006년 가석방됐다.

2012년 '에이미 해결사 검사' 사건도 검사의 비뚤어진 정의감이 빚은 결과다. 전 모(당시 35세) 검사는 프로포폴을 불법투약한 혐의로 자신이 기소한 연예인 에이미(본명 이현지)가 성형부작용을 호소하자, 병원장을 협박해 무료로 재수술하고 보상금을 내놓도록 했다. 검사가 '해결사' 역할을 한 공권력 남용 사례다. 전 검사는 2014년 구속·해임됐고, 법정에서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자기확신형 범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초식 동물과 약한 동물은 시야가 넓지만,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맹수는 시야가 좁다.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은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추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지금 저 목표를 가기 위해서 지금 이게 불법이나 잘못된 것이란 걸 판단조차 못하게 된다."

유진그룹과 사기범 조희팔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12년 검찰에 출두한 김광준 전 부장검사(가운데) [중앙포토]

‘내 주머니 불리기’
금품·향응 수수형

검사가 직접 금품이나 향응을 받은 사건도 적지 않다. 1997년 의정부 법조비리, 1999년 대전법조비리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변호사나 브로커가 판·검사에게 광범위하게 '떡값'을 돌리는 문화는 법조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검사가 개별적으로 금품·향응을 받다가 적발되는 사례는 최근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사건의 공통점은 대개 40대~50대 초반 검사들의 탈선 유형이라는 점이다.

2006년 브로커 김홍수에게 각각 800만~1000만원을 받아 형사처벌된 검사 3명은 당시 40세, 46세, 44세였다.

2008년 '1억 법인카드 검사' 사건은 검사가 금품 수수로 해임된 최초의 사례다. 부산고검의 김 모(당시 45세) 부장검사는 2005년 여주지청장 재직 시절 골프장 사장으로부터 법인카드를 건네받아 9766만원을 사용했다. 3년 뒤 이 사실이 드러나자 법무부는 김 검사를 해임했다.

2006~2007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1만 달러를 받아 정직6월 징계를 받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김종로 부장검사는 금품 수수 당시 45세였다. 박 회장에게 5000달러를 받아 감봉 징계를 받은 민 모 검사장도 52세였다.

2009년 부산 건설업자 정모씨에게 2009년 향응과 청탁을 받은 혐의로 각각 면직·정직·감봉 징계를 받은 박 모(당시 51세) 부산지검장, 김 모(당시 47세) 부장검사, 정 모(당시 48세) 부산고검 검사도 40대 후반~50대 초반이었다.

2008년 건설업자에게 청탁 대가로 그랜저 승용차를 받은 정 모 부장검사는 당시 49세, 사기범 조희팔 측근에게 10억원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이중 4억여원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은 김광준 부장검사도 당시 47세였다.

‘내 자식 챙기기’
비뚤어진 학부모형

일부 검사들은 직위를 이용해 자식을 챙겼다. 2005년 '검사 아들 내신시험 부정행위' 사건과 2006년 '검사 자녀 경진대회 대리출품 의혹' 사건이 그 예다.

2004년 서울 배재고 담임교사가 정모(당시 49세) 서울고검 검사 아들의 중간·기말시험 답안지를 바꿔 성적을 올려줬다. 같은 학교 교사에게 불법과외도 알선했다. 2005년 수사 과정에서 정 검사가 아들을 이 학교에 편입시키기 위해 위장전입을 했고, 아들 정 군이 일부 답안지를 직접 조작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정 검사와 아들은 시험부정 행위로 처벌받지 않았다. 검찰이 이들은 무혐의 처분하고 교사들만 기소했다. 정 검사는 위장전입 혐의만 인정돼 불구속 기소(이후 벌금 500만원 선고)됐다. 법무부 징계도 받지 않았다.

이듬해 '검사자녀 경진대회 대리출품' 의혹의 처리 과정도 비슷했다. 서울교육청 연구관 김 모씨가 부유층 학부모에게 돈을 받고 학생 발명경진대회 출품작을 대신 만들어줬다. 이 대회 주요 상을 받으면 특기자 전형으로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김 씨가 대리출품해 입상한 학생 18명 가운데 2006년 당시 전·현직 검사 자녀 3명이 포함돼 있었다. 차모(당시 47세) 검사장, 황모(당시 45세) 부장검사, 앞서 아들을 배재고에 위장전입시켰던 전직 검사 정모(당시 51세) 변호사였다. 정 변호사의 딸은 경진대회 입상 덕에 명문대에 입학했다.

다른 학부모들은 모두 뇌물을 준 혐의로 입건됐지만, 전·현직 검사 부인들은 증거부족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당시 해당 검사들은 "학교 대표로 뽑혀 상 받았고 부정은 없다" "아이가 직접 만든 뒤 김씨의 조언을 받았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2014년 제주지검장이 노상에서 음란행위를 하다 여고생의 신고로 붙잡혔다. 범행 전 CCTV에 찍힌 모습 [중앙포토]

‘고삐 풀린 성(性)’
추행·희롱형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검사가 연루된 성추행·성희롱 사건이 크게 늘었다.

2010년 '여검사 성희롱 사건'이 대표적이다. 법무연수원 교수로 파견근무 중이던 손 모(당시 45세) 부장검사가 회식 자리에서 여성 검사에게 입맞춤을 요구했다. 2013년 국선 여성변호사를 성추행한 36세 이모 검사, 2015년 동료 여검사를 성희롱한 32세 윤모 검사도 있었다. 세 검사는 모두 법무부로부터 가벼운 징계인 '견책' 처분을 받았다.

2011년 검사 직무대리 수습생을 성추행한 구모(당시 38세) 검사는 면직, 같은 해 검사 시보를 성추행한 박모(당시 46세) 부장검사는 감봉 징계를 받았다. 2012년 여기자를 성추행한 최모(당시 48세) 부장검사는 정직 처분을 받고 얼마 뒤 사표를 썼다. 세 전직 검사 모두 얼마 안 되어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의 법조계 진출이 계속 늘고 있지만 일부 남성 검사들이 여성을 동등한 업무 파트너로 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검사가 일으킨 성 추문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2012년 발생했다. 절도 사건을 수사하던 전모(당시 30세) 검사가 여성 피의자와 성관계를 맺은 사건이었다. 전 검사는 해임됐고, 대법원에서 성관계 대가성을 인정해 뇌물수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검사·판사·공무원 징계 비교
※검사징계법, 법관징계법, 인사혁신처 '공무원 징계사례집'
징계 적용
종류 내용 공무원 검사 판사
파면 -5년간 공무원 임용 불가
-퇴직금·연금 1/2 삭감
O X X
해임 -3년간 공무원 임용 불가 O O X
면직 -직을 잃음 (공직 재임용 지장 없음) X O X
강등 -1계급 내림
-3개월간 직무 정지, 급여 삭감
O X X
정직 -해당 기간 직무 정지, 급여 삭감 O O O
감봉 -해당 기간 급여 1/3 삭감 O O O
견책 -훈계해 반성하게 함 O O O

검사 징계는 ‘솜방망이’(?)

“검사는 탄핵이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 받은 경우가 아니면 파면되지 않는다”(검찰청법 37조).

검사의 신분은 법으로 보장된다. 최고 징계가 해임이다. 공무원 최고 징계인 파면보다 한 단계 낮다.

파면되면 이후 5년간 공무원에 임용될 수 없고, 퇴직금과 연금이 절반으로 깎인다.

반면 해임되면 이후 공무원 임용 제한이 3년이고, 퇴직금과 연금은 다 받을 수 있다(공금 횡령이나 뇌물 수수로 해임된 경우에만 퇴직급여 25% 삭감).

검사의 경우 해임되면 3년 간 변호사가 될 수 없는 불이익이 추가된다(변호사법 5조 5항).

해임된 검사들
해임 시점 사유(관보 게재) 이름 당시 직위 형사 처벌
2009년 기업 법인카드 1억여원 사용 김OO 부산고검 검사 X
2013년 10억여원 뇌물수수 김OO 서울고검 검사 징역 7년
2013년 피의자와 성관계 전OO 서울동부지검 검사 징역 2년
2014년 에이미 관련 성형외과 원장 협박 전OO 서울중앙지검 검사 징역 8월(집유2년)
2016년 넥슨 주식 등 9억여원 뇌물 수수 진경준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구속돼 재판 중
2016년 후배검사 폭언·폭행 김OO 서울남부지검 부장검사 X

지금까지 해임된 검사는 총 6명뿐이다.

그나마 2006년 이전까지는 검사에 대한 해임도 불가능했다. 법정 최고 징계가 해임 아래인 면직이었다. 2007년 1월 개정 검사징계법이 시행되며 해임이 추가됐다.

면직은 말 그대로 ‘옷을 벋는다’는 의미다. 파면ㆍ해임과 달리 면직은 공직 재임용이나 연금 수령에 제한이 없다. 과거에는 변호사 활동에도 제한이 없었지만 2014년 5월 변호사법이 개정돼 징계 면직된 검사는 2년간 변호사가 될 수 없게 됐다.

면직된 검사들
해임 시점 사유(관보 게재) 이름 당시 직위 형사 처벌
2007년 정명석에게 JMS 수사내용 유출 이OO 서울북부지검 검사 O
2010년 건설업자로부터 향응, 수사 청탁 박OO 부산지검장 O
2011년 검사직무대리 수습생을 성추행 구OO 광주지검 장흥지청 검사 O
2013년 피의자를 변호사 매형에 소개 박OO 서울중앙지검 검사 X (재판받는 중)
2013년 사건 관계인에 룸살롱•모텔 향응 강OO 광주지검 순천지청 검사 O
2013년 피의자에게 골프접대 (234만원) 안OO 전주지검 검사 O
2014년 금품 수수 800만원 정OO 수원지검 검사 X

물의를 일으킨 검사들은 징계를 받기 전 재빨리 사표를 내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 활동에 지장을 받거나 연금ㆍ퇴직금이 깎이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이런 사표는 수리를 해선 안 된다. 실제로 ‘비위 공직자의 의원면직 처리 제한에 관한 규정’(대통령 훈령 제143호)은 "징계가 청구됐는데 중징계가 예상되거나, 검찰•경찰•감사원의 조사나 수사, 또는 내부 감사를 받고 있는 공무원의 사표를 처리해선 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2006년 브로커 1000만원 수수 검사, 2008년 그랜저 검사, 2011년 벤츠 여검사, 2014년 음란행위 지검장 등이 그 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 주인공들은 사건이 불거지자마자 즉시 사표를 냈고 모두 수리됐다. 덕분에 모두 법무부 징계를 피했다.

판사는 검사보다도 강력한 신분 보장을 받는다. 헌법 106조의 ‘법관의 신분 보장’ 항목에 따라서다. 검사의 최고 징계는 해임이지만 판사의 최고 징계는 정직이다. 사채업자에게 2억여원의 뇌물을 받은 최모 판사가 정직 1년을 받은 게 지금껏 판사에게 내려진 역대 최고 수위 징계다.

CHAPTER 6. 정치검사·전관예우 그리고 검찰 개혁

떠난 자와 남은 자

떨어지지 않는 '정치검찰' 꼬리표

1950년 이승만 정권은 검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사를 단행했다. 김익진 검찰총장을 서울고등검찰청장으로 강등시킨 것이다. 당시 검찰은 대통령이 만든 대북 관련 사설수사대를 수사해 청와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검찰은 정권에 휘둘리는 '정치검찰'이란 꼬리표를 달게 됐다. "공정 수사의 필수조건인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운동권 여대생을 성고문한 경찰(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땅값 조작 의혹을 받은 현직 대통령 아들(이명박 전 대통령 내곡동 사저 매입 사건)을 불기소한 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검찰이 이렇게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검찰 수장인 총장을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은 평검사에 대한 인사권과 개별 수사에 대한 지휘권을 갖는다. 정권이 검찰총장에 '내 사람'을 앉히면 사실상 검찰 조직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셈이다.

역대 정권이 검찰의 소위 '6대 요직'에 어떤 인사를 임명했는지 살펴봤다.

검사의 ‘족보’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아님 잘 태어나거나"

영화 '내부자' 속 부장검사는 주인공인 '족보' 없는 검사(조승우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검찰에서 출세·승진하려면 실력만큼 '족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실제 검찰 주요 보직자의 출신지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크게 요동쳤다. 김영상 정부 땐 부산·경남(PK) 지역 출신이 약진했고, 김대중 정부 땐 호남 출신이 전면에 나섰다. 김종필 전 총리와 손을 잡고 정권을 창출한 김대중 정부는 충청권 출신도 중용했다.

정권 교체로 몰락했던 PK출신은 노무현 정부 들어 호남 출신과 함께 검찰의 양대 축으로 부활했다.

포항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 대구 출신인 박근혜 대통령은 대구·경북(TK) 출신을 요직에 많이 앉혔다.

주요 보직자 출신대학은 검사 전체 평균과 마찬가지로 서울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명박 정권 때를 제외하면 모든 정권에서 서울대 출신 비중이 70%가 넘었다. 이명박 정부 땐 대통령과 동문인 고려대 출신 보직자가 35%까지 늘었다. 다른 정권에선 10~20% 수준이었다.

청와대의 검사들

정권이 검찰을 장악하는데 인사권만큼이나 요긴하게, 또 자주 쓰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청와대 파견 검사'다.

청와대는 대대로 검찰에서 엘리트 검사를 파견받아 대통령 비서실에 써왔다. 민정수석비서관도 대대로 검찰 고위직 출신을 임명했다. 이들 전·현직 검사를 통해 검찰 조직 내부와 수사 상황을 파악해 왔다.

물론 청와대에서도 법리를 다뤄야 할 일이 있고 그 때문에 법조인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또 이런 일을 맡기기에 민간인 변호사보다는 같은 공무원인 검사가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장검사는 “가령 '김앤장' 같은 로펌 변호사를 쓰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나. 파견 검사 덕에 양질의 서비스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이 계속 되는 한 '검-정 유착'에 대한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김대중 정부는 이 때문에 1997년 검사직과 비서실 직위를 겸임할 수 없도록 검찰청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이 조항은 채 몇 년 안돼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검사를 사직하고 청와대에서 일한 뒤, 다시 검찰로 복귀하는 '편법'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선 한발 더 나아가 청와대 파견 검사들이 소위 핵심 요직을 차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 전까지는 청와대 파견 검사가 복귀하면 고등검찰청·법무연수원 같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않는 자리로 발령이 났다. 검찰 내부 인사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단 취지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의 파견 검사들은 법무부나 대검찰청, 서울 주요 지검의 검사장 승진 1순위 자리 등 주요 보직으로 복귀했다.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가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법조비리 의혹과 관련해 2016년 5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됐다. [중앙포토]

‘전관예우’란 보험

정권의 '검사 사랑'은 전·현직을 가리지 않는다. 우병우 현 청와대 민정수석은 검찰을 떠난 지 2년 만에 검찰 인사를 쥐락펴락 하는 정권 실세 자리에 올랐다.

정권이 전·현직을 불문하고 검사를 중용하는 건 그만큼 검찰 권력이 크다는 걸 방증하는 대목이다. 검찰 권력이 대체제가 없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이후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군사 정권 몰락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군부가 쇠퇴하면서 검찰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며 "특히 노태우 정권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 안기부장 등 요직을 검찰이 장악하며 검찰 전성시대를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렇다 보니 '잘 나가는' 검사 선배는 검찰을 떠나서도 언제든 후배 검사들의 명줄을 쥐고 흔들 수 있다. 악명 높은 '전관예우' 문화가 생긴 배경이다.

개업 후 4년여 만에 오피스텔 120채를 사들일 홍만표 변호사의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검사장 출신인 그는 현직 시절 요직을 두루 거친 소위 '에이스 검사' 였다. 언제 어디서 다시 그를 마주칠지 알 수 없는 후배 검사들이 그의 전화를 매몰차게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게 법조계 얘기다.

'전관'의 활동 범위는 청와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20대 국회의원 중 검사 출신은 15명, 전체 국회의원(300명)의 5%를 차지한다.

대검찰청 정병하 감찰본부장(왼쪽)과 윤웅걸 기조부장이 2016년 8월 검찰 개혁 방안을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반쪽짜리 개혁

'정치 검찰'이란 꼬리표를 떼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정부와 정치권, 검찰과 법조계 양쪽에서 여러 차례 검찰 개혁을 시도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1조2항)'. 검찰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이 아닌 정권이 검찰 권력을 휘둘러선 안 된다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정부의 검찰 개혁 대장정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됐다. 1996년 검찰총장 퇴임 후 2년 간 모든 공직에 임명할 수 없도록 하는 법조항이 만들어졌다(옛 검찰청법 12조4항). 정부 눈치를 보지 말고 수사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조항은 1년 만에 사라졌다. 헌법재판소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위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땐 특별검사제가 도입됐다.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부인이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 부인들에게 고가의 옷을 선물한 옷로비 사건이 계기가 됐다.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의 부인 뿐 아니라 법무부·통일부 장관 등 정권 실세 부인이 연루돼 있어 검찰이 수사할 경우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파격적인 인사로 검찰 개혁의 신호탄을 쐈다. 정권 첫 법무부 장관에 판사 출신 강금실 판사를 앉힌 거다. 게다가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강 전 장관은 직전 장관(심상명·4회 합격)이나 다음 장관(김승규·12회 합격)과 비교해 법조인 경력이 10년 이상 짧았다. 예상대로 검사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쯤 하면 막하자는 거지요”라는 유행어를 남긴 ‘평검사와의 대화’도 이때 이뤄졌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도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찰 주요 보직은 특정 지역 출신이 독식하는 등 정권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반쪽짜리 개혁'이란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고육지책 셀프개혁

검찰의 자체적인 개혁 시도 역시 쉼없이 계속되긴 했다. 하지만 개혁안 대부분이 검사 비리가 불거지거나 수사 도중에 피의자가 사망하는 식의 사고 직후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2009년 법무부와 검찰이 만든 공보준칙이 대표적이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다 목숨을 끊자 나온 대책이었다. 대검찰청 감찰부를 감찰본부로 확대하고 민간으로 구성된 감찰위원회를 신설하는 개혁안은 2010년 스폰서 검사 파문 이후 만들어졌다.

하지만 검찰의 셀프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부 인사를 앉히겠다고 약속한 감찰본부장은 검사 출신 변호사의 몫이 됐고, 감찰 전 과정에 참여토록하겠다던 감찰위원회는 감찰 결과를 듣고 징계수위에 대해 권고하는 권한만 주어졌다. 2010년 개혁안엔 검사 범죄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를 시행하겠단 내용도 포함됐지만 특임검사를 총장이 인선하게 하면서 총장의 권한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검찰시민위원회를 만들어 검사가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에 대한 배심제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은 아예 개혁안에서 빠졌다.

올 7월 발표된 검찰개혁안도 진경준 검사장 사건과 김홍영 검사 자살 사건 이후 나왔다. 고검장을 팀장으로 4개의 태스크포스(TF)팀을 꾸리겠다는 게 검찰의 복안이지만 '중이 제 머리 깎겠냐'는 목소리가 검찰 내부에서도 나온다. 게다가 개혁안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김형준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이 불거지면서 정치권에선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를 전담하는 전담 수사처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치검사·전관예우 그리고 검찰 개혁 Chapter 6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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