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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선장에게 총 쏜 아라이 몸무게 10kg 늘어 … “한국서 살고 싶다”

중앙일보 2012.11.24 01:04 종합 18면 지면보기
대전교도소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마호메드 아라이(오른쪽). 소말리아 해적 출신인 아라이는 지난해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에게 총을 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진 JTBC]

이달 초 대전교도소 한국어 교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외국인 재소자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오해에서 비롯되는 나쁜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마련된 특별 프로그램에 모여 앉았다. 그런데 취재진은 교실에서 뜻밖의 얼굴들을 만났다. 지난해 초 소말리아 인근 해상에서 우리 해군에 생포된 해적들이었다.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해 한국인 인질들을 협박하며 석해균 선장에게 총까지 쏜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러 온 것이다. ‘해상 강도 살인미수’라는 낯선 죄명으로 한국 법정에 섰던 소말리아인들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해적들의 달라진 모습이다. 우리 해군 특수부대의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될 때만 해도 이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2년 가까운 한국 교도소 생활은 그들의 눈매와 외모를 완전히 바꿔놨다. 석 선장에게 총을 쏴 살해하려 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마호메드 아라이(23)는 몸무게가 10㎏가량 늘었다. 얼굴에는 험상궂은 표정 대신 여유와 미소가 넘쳤다. 15년형을 받은 아울 브랄렛(20)도 마찬가지. 재판 내내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던 브랄렛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13년형을 선고 받은 압둘라 알리(25)도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강남스타일 조금 할 줄 안다”

 이들은 ‘소말리아-영어’ 사전까지 구해놓고 한국어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사전을 자세히 살펴보니 미국 뉴욕의 주소가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묻자 “누군가 보내줬다”고 했다. 아라이는 가수 싸이의 인기곡 ‘강남스타일’을 언급하면서 “한국말 조금 할 줄 안다”며 웃었다. 브랄렛은 “선생님 좋아. 닭고기 맛있어”라며 한국 교도소 생활이 만족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감옥 생활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해 살고 싶다”는 얘기까지 했다. 알리는 “‘달리다’ ‘날다’라는 우리말을 소말리아어로는 뭐라고 하느냐”고 묻는 한국어 교사와 연신 말을 주고받았다.

 황량한 바다 위를 떠다니며 약탈과 범죄를 일삼던 해적들을 착실한 학생으로 탈바꿈시킨 건 대전교도소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헌신이다. 지정수 대전교도소장은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외국인들이 강제 출국될 경우 자칫 한국에 대해 원한을 가질 수 있다”며 “이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게 되면 출소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도 이런 인식을 전파할 것이고, 결국은 재외 한국인 보호에도 상당히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 소장은 “재소자들에게 좋은 처우를 해주는 것은 국제적인 인권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한국어 교습 자원봉사를 하는 ‘국제과학기술자협의회’도 변화의 1등 공신이다. 1997년부터 대전·천안·청주 교도소에서 외국인 재소자에게 한글을 가르쳐온 이들이지만 지난 3월 해적들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한 선생님의 증언.

 “어느 날 시커먼 얼굴에 새하얀 이를 드러낸 학생들이 나타났어요. 10년 넘게 봉사를 해왔지만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TV에서 본 해적이구나’라는 직감이 들었죠.”

 부산에 있던 아프리카 해적들이 대전으로 온다는 소문은 이미 교도소에 퍼져 있었고, 한 교실에 앉게 된 필리핀·캄보디아 국적의 재소자들도 말로만 듣던 해적들의 출현에 상당히 긴장한 모습들이었다고 한다.

 “팽팽한 긴장 속에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냐’고 묻자 새로 온 학생은 ‘나는 소말리아 해적!’이라고 답했습니다. 순식간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죠.”

 이날 수업에 온 이난 알리(22)는 한국어 공부에 재미를 느꼈고, 다른 동료들을 데려와 해적 학생이 4명으로 늘었다. 자원봉사 교사 이보욱씨는 “교도소의 배려와 협조로 해적들이 새 삶을 꿈꿀 수 있게 됐다”며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이들의 모습에 흐뭇해했다.

수업시간에 ‘아리랑’ 함께 부르기도

지난해 1월 해군에 생포된 소말리아 해적 아라이.
 달라진 해적들의 수업 장면이 JTBC를 통해 보도되자 인터넷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갖 범죄를 저지른 그들에게 한국어를 왜 가르치느냐”는 항의와 “열심히 배워서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격려가 팽팽히 맞섰다.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은 이들이 한국 선원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악당들에게 세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해적들에게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내용이다. 해적들이 한국어를 배우면 더 위험해지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해적들이 한국말을 배우면 나중에 한국인을 납치해 한국말로 협박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다.

 이와 반대로 동정론도 적잖았다. “이들이 소말리아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원하든 원치 않든 해적으로 살아가게 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교도소에서 나간 뒤 또 어떤 범죄를 저지를까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아니냐”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고국에 전해 해적들이 한국 배는 안 건드리면 좋겠다”는 의견도 올라왔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감사한다”는 사람도 있다.

 아직 낯설기만 한 해적을 둘러싼 상황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국 역사도 가르쳐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걸 아프리카에 알려라” “TV를 보니 해적들이 반말을 하던데 존댓말을 가르치면 좋겠다”는 등 여러 제안이 나왔다.

 또 하나의 논쟁은 브랄렛이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방송되면서 불거졌다. 이들이 출소 후 한국에 머물기를 희망할 경우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한국에서 새 삶을 살게 해주면 좋겠다”는 견해도 나왔지만 “한국 이미지를 좋게 만든 뒤엔 소말리아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많았다.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엔 해적들이 저지른 죄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네티즌이 다수였다. 이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교도소 담장 안에 있는 해적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취재진이 참관한 외국인 재소자들의 한국어 수업은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세계 각국의 재소자들 사이에서 아라이와 브랄렛, 그리고 알리도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며 아리랑을 열심히 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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