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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18) 미녀의 도시 충칭(重慶)

중앙일보 2012.11.12 00:03 경제 10면 지면보기

인구 3300만 명의 메트로폴리스 충칭(重慶)시는 1997년 중국의 네 번째 직할시로 독립했다. 올 초 보시라이(薄熙來) 당서기 몰락으로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붉은 도시’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충칭을 임시 수도로 삼아 항일전쟁을 치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도 잠시 머물렀다.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火鍋)와 미녀의 고장, 충칭으로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충칭은 창장(長江) 상류와 유수로 불리던 자링(嘉陵)강이 합류하고, 험준한 산이 사방을 둘러친 ‘산수지성(山水之城)’ 이자 수로 교통의 요새다. 물산이 풍족해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리는 쓰촨(四川)으로 들고 나는 길목이다.

인구 3300만, 수로 교통의 요새 … 국민당 땐 임시 수도로



 “가을밤 아미산엔 반달이 걸려 있고, 달그림자 평강강에 비쳐 강물 따라 흘러가네(峨眉山月半輪秋, 影入平羌江水流)



 한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는데, 그대 생각하나 만나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간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에서 노래한 유주가 지금의 충칭이다. 고대 파(巴)나라의 땅이었다. 파나라 사람들은 상무(尙武)정신이 탁월했다. 전국(戰國)시대 파나라에 내란이 발발했다. 파만자(巴蔓子) 장군은 내란 진압을 위해 초(楚)나라에 3곳의 도시를 담보로 원군을 청했다. 초나라 군사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했지만 차마 약속한 국토를 떼어줄 수는 없었다. 파만자는 자결한 뒤 자신의 머리를 초나라에 보냈다. 초왕은 장군의 충정에 감동해 도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목숨으로 땅을 지킨 셈이다. 훗날 당(唐)태종은 파만자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명에 ‘충(忠)’을 하사했다. 충칭시 중(忠)현의 유래다.



충칭의 도심 위중(?中)반도 야경이다. 충칭 부두 야경은 홍콩 야경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경치를 자랑한다. 평지가 좁아 고층 건물이 발달한 충칭의 스카이라인이 조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앙포토]


 충칭이란 이름은 송(宋)나라 때 유래했다. 당시 이곳에서 반란의 기운을 포착한 황제는 “공순하라”는 의미로 지명을 공주(恭州)로 바꿨다. 1189년 정월 송나라 효종(孝宗)은 아들 조돈(趙惇)을 공왕(恭王)에 봉했다. 조돈은 왕에 봉해진 지 한 달 만인 2월 광종(光宗)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에 ‘경사가 두 번 겹쳤다(雙重喜慶)’란 뜻의 중경부(重慶府)로 승격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남송은 충칭의 조어성(釣魚城)을 근거로 몽골군대와 36년에 걸쳐 처절한 항전을 펼쳤다. 송나라 군대의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 몽골제국의 4대 황제인 원(元) 헌종(憲宗) 몽케 칸이 이끄는 군대였다. 몽케는 쓰촨을 우회해 창장 남쪽 송나라의 심장을 노렸다. 5만의 몽골군은 5000명이 지키는 조어성에서 크고 작은 20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몽케 칸은 1259년 조어성 전투 중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세계 최강국의 지도자가 충칭에서 돌연사한 것이다.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저우)이 함락된 뒤에도 충칭은 3년간 항전을 계속했다.



 몽골의 지배는 영원하지 못했다. 1363년 홍건군의 영수 명옥진(明玉珍)은 충칭을 수도로 하(夏)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충칭은 내륙 도시로는 처음으로 개방된 대외 통상항구였다. 1876년 청(淸)이 영국과 옌타이(煙臺)조약을 맺어 영국 영사관이 처음으로 세워졌다. 청일전쟁 패배로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에 개방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불리한 전세에 몰린 국민정부는 1938년 10월 충칭을 전시 임시 수도로 삼고 일본과 맞섰다. 원나라 말에 이어 두 번째로 충칭은 대륙의 수도가 됐다.



 1945년 일본이 패퇴하자 당시 주중 미국대사 패트릭 J 헐리의 중재로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가 충칭에서 만났다. 43일간 치열한 국공담판이 벌어졌다. ‘쌍십협정’이 맺어졌다.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곳은 장제스의 쩡자옌(曾家岩)관저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공산당 남방국 사무실로 사용하던 주공관(周公官)과 ‘스파이 마스터’로 불리던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의 수장 다이리(戴笠)의 관저가 인근에 있다. 장제스는 쩡자옌 관저 외에도 충칭에 세 곳의 관저를 더 운영했다. 국공담판이 벌어졌던 구이위안(桂園) 관저, 황푸군관학교의 후신인 국민당 중앙정치학교가 옮겨 왔던 곳에 위치한 샤오취안(小泉) 교장 관저, 지금은 항전유적지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황산(黃山)관저가 그곳이다.



# 충칭의 양대 세력, 포가와 방망이부대



1945년 충칭 담판 중에 국공양당의 거두 장제스(사진 앞줄 가운데)와 마오쩌둥(앞줄 오른쪽)이 포즈를 취했다. 맨 왼쪽 인물은 담판을 주선한 당시 주중 미국대사 패트릭 J 헐리. 바로 뒤엔 장제스의 아들 장칭궈. [중앙포토]
2007년부터 4년간 충칭의 ‘제후’로 군림한 보시라이는 폭력배를 근절하겠다며 대대적인 타흑(打黑) 운동을 벌였다. 충칭의 뿌리 깊은 ‘조직’ 문화를 퇴치하려는 캠페인이었다. 보시라이는 이 캠페인으로 인기도 얻었다. ‘조직’의 문화는 17세기로 올라간다. 중국 땅을 장악한 만주족의 청은 한족에게 변발을 강제했다. 머리카락 아니면 머리를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한족들은 명(明)나라를 재건하려는 비밀 조직을 곳곳에서 만들어 항거했다. 충칭의 비밀조직 이름은 ‘포가(袍哥)’였다. ‘도포 입은 사내’라는 뜻이다. 80년대를 풍미했던 영화 ‘영웅본색’에서 긴 코트자락 날리던 소마역의 저우룬파(周潤發)가 전형적인 포가 출신이다. 청나라 말기 포가는 철도 국유화를 반대하는 보로(保路)운동을 주도했다. 포가들의 철도주권 보호운동은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비밀 결사조직 포가는 철의 규율로 무장했다. 군신·부자·형제·부부·친구 사이의 실천덕목인 오륜(五倫),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여덟 가지 덕(八德)은 포가들의 생활 신조였다.



 ‘방망이부대[棒棒軍]’도 충칭 특유의 세력이다. 항구도시인 충칭엔 언덕이 많다. 등에 몽둥이를 짊어지고 짐을 나르는 짐꾼들이 도처를 누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만에서 40만의 방망이부대가 충칭에서 활동 중이다. 1996년 TV 드라마 ‘산성의 방망이 부대(山城棒棒軍)’가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훠궈·미녀·방망이가 충칭의 3대 명물이 됐다.



# 한국 기업은 충칭 공략 나설 때



충칭은 소비 도시다. 쓰촨성 청두와 함께 중국의 전형적인 내수지향 도시다. 임가공→수출 모델로 발달한 도시가 아니다. 중국은 지금 ‘세계의 공장’을 지나 ‘세계의 시장’으로 탈바꿈 중이다. 추진 중인 한·중 FTA 체결은 중국의 내수시장이 한국에 열리는 천우신조의 기회다. 내수도시 충칭은 중국 내수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한국 기업들에 포기할 수 없는 진검 승부처다.



 지금 진행 중인 18차 중국공산당 전당대회 이후 충칭의 신임 ‘제후’로 쑨정차이(孫政才)가 하마평에 오른다. 농업부 장관을 거쳐 지린(吉林)성 서기를 맡고 있는 쑨정차이는 6세대 지도자 그룹의 선두주자다. 또 다른 차기 주자인 후춘화(胡春華) 네이멍구 서기는 광둥성 서기 물망에 오른다. 왕양(汪洋)과 보시라이가 각각 광둥모델, 충칭모델을 내세워 차기 상무위원 진입을 노리던 것과 같은 구도다. 충칭은 광둥과 함께 차기 지도자의 담금질 코스가 됐다.



# 충칭의 명소



●홍애동(洪崖洞): 충칭 전통의 산비탈에 기대어 지은 ‘조각루(吊脚樓)’식 건물이다. 언덕의 1층이 강가의 11층이 되는 방식의 건물이다. 과거 충칭 12경 중 하나인 ‘홍애동의 폭포물 떨어지는 모습(洪崖滴翠·홍애적취)’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십팔제(十八梯): 베이징에 서민들의 뒷골목 후퉁(胡同)이 있다면, 충칭에는 ‘열여덟 계단’이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명(明)나라 시절 우물이 있던 곳으로 주민들 거주지 사이에 18개의 돌계단과 함께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아령공원: 2010년 중국의 최대 흥행 영화 ‘양자탄비(讓子彈飛)’의 배경인 아성(鵝城)과 이름이 같다. 청말 초대 충칭상회 회장의 별장터로 신중국 성립 후에는 서남군구 사령부 주둔지였다. 쓰촨 출신 덩샤오핑(鄧小平)이 이곳에 머물렀다. 지대가 높아 충칭의 전경을 보는 명소로 유명하다.



●창장케이블카: 충칭의 ‘공중 복도’로 불린다. 충칭의 랜드마크다.



●자기구(磁器口): 충칭의 인사동이다. 옛 전통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다. 18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강 하나, 개천 둘, 산 셋, 도로 넷(一江兩溪三山四街)‘을 품고 있다. ‘작은 충칭(小重慶)’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래탄고진: 중국의 10대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꼽힌다. 고성이 아름다운 윈난(雲南)성의 리장(麗江)과 비슷한 분위기 때문에 충칭의 리장이란 별칭이 붙었다.



●가락산(歌樂山): 과거에는 충칭 12경 중 하나인 ‘가락영음(歌樂靈音)’으로 유명했다. 운정사(雲頂寺)의 12개 청동 방울에서 나는 소리로 명성을 얻었으나 국공내전을 거치며 혁명의 무대로 탈바꿈했다. 충칭이 국민당의 수도였을 당시 지하에서 활약하던 공산당원의 활동 근거지였다. 소설 ‘홍암(紅岩)’의 무대가 이곳이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혁명가요 부르기인 창홍(唱紅) 캠페인을 펼친 것도 충칭의 이런 뿌리 깊은 혁명 전통이 배경이 됐다.



●조천문(朝天門): 충칭의 상징이다. 창장과 자링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위치한다. 충칭 서민들의 앞마당이다.



●해방비(解放碑): 충칭에는 ‘3000년 강주성(江州城), 800년 중경부, 100년 해방비’란 말이 있다. 충칭의 최대 번화가인 해방비 앞을 지나는 미녀들의 모습은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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