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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 걸로 스타덤… 관능·지성미 두루 갖춘 ‘팔색조’

중앙선데이 2012.11.11 00:49 296호 28면 지면보기
영화사 전체를 털어 가장 장기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단연 ‘007 제임스본드’ 시리즈일 것이다. 비주류 본드 영화 두 편을 제외한 이온(EON)영화사 제작물 기준으로 보면 1962년 제1편 ‘살인 면허(닥터 노)’로 시작한 본드 영화는 최근 개봉한 23탄 ‘스카이폴’까지 모두 5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007 영화는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남성 취향의 오락물이란 특성 때문에 영화제에서 그 흔한 상 한 번 타지 못했다. 주인공 본드가 영국 정보기관 MI6 소속 해군 중령이므로 영국 또는 영연방 출신 배우로 캐스팅했다. 숀 코너리(스코틀랜드), 조지 라젠비(호주), 로저 무어(잉글랜드), 티머시 돌턴(웨일스), 피어스 브로스넌(아일랜드), 대니얼 크레이그(잉글랜드) 등이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

세계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본드 영화에도 이름을 올렸다. 우선 초기 2인 공동 제작진 중 한 명이며 독일계 캐나다 유대인인 해리 솔츠먼(1994년 작고)은 동업자 앨버트 브로콜리와 함께 초기 9편을 제작했다. 본드 영화를 보는 주요 흥밋거리는 주인공의 액션과 정교한 공작상이다. 이외에도 악당 역 배우의 연기력, 공작용 소도구, 세계 명소, 스포츠카, 주제곡 그리고 본드 걸이다. 악당 역을 맡은 유대인 배우도 몇 명 있다. ‘닥터 노’의 조셉 와이즈만(독일계), ‘죽느냐 사느냐’의 흑인 배우 야펫 코토(카메룬계), ‘옥토퍼시’의 스티븐 버코프(루마니아계), ‘리빙 데이라이트’의 제로엔 크라베(네덜란드계) 그리고 ‘퀀텀 오브 솔라스’의 프랑스 배우 마티유 아말릭(폴란드계) 등이다. 주제가 가수 중엔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주제곡 <노바디 더즈 잇 베터>를 부른 칼리 사이먼이 유일한 유대인이다.

주연급 유대인 본드 걸은 모두 5명이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의 질 세인트 존(독일계), ‘죽느냐 사느냐’의 제인 세이무어(폴란드계),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바버라 바크(오스트리아계), ‘뷰 투어 킬’의 타냐 로버츠(러시아계) 그리고 ‘카지노 로얄’의 에바 그린(사진)이다.

유럽식 예술영화 제작 방식 선호
그린은 1980년 파리서 여자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아버지는 스웨덴인, 어머니 마를렌 조베르는 알제리 태생 세파라디 유대인이다. 조베르는 70∼80년대에 이름을 날린 프랑스 여배우다.

그린은 어린 시절 루브르박물관 고대 이집트관을 본 뒤 커서 고고학자가 되리라 맘먹었다. 파리 미국 초등학교를 나온 후 프랑스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녀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한 ‘아델 H’란 영화를 본 뒤 배우가 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프랑스 생 폴 연기학원, 런던 웨버 더글러스 연극학교를 다녔다. 2002년 첫 연극무대에 올랐고 그해 신인 연기자상을 받았다.

2003년 영화계에 진출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감독한 ‘몽상가들’에 출연했다. 베르톨루치는 72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란 화제작을 만들었고 87년엔 ‘마지막 황제’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한 원로 이탈리아 감독이다. 그린은 ‘몽상가들’에서 신인답지 않은 대담한 올 누드 신을 선보였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대하작품 ‘킹덤 오브 헤븐’에선 십자군시대 예루살렘왕국 여왕 시빌라 역을 연기해 데뷔 2년 만에 할리우드 티켓 파워로 발돋움했다. 2006년 007영화 ‘카지노 로얄’서 프랑스 여배우론 네 번째로 주연급 본드 걸 역을 맡으면서 국제적인 배우로 발판을 굳혔다. 이어 ‘황금 나침반’(2007), ‘퍼펙트 센스’(2011), ‘다크 섀도우스’(2012) 등에도 출연해 필모그래피를 넓혔다.

그린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 연기자 DNA, 미모, 몸매, 연기력 등 여배우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지녔기 때문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 매 영화마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흡사 팔색조와 같이 순발력 있게 변신했다. 청초한 여인, 퇴폐적 관능미, 지성미, 팜 파탈 그리고 마녀 역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신들린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상업성 가득한 할리우드 영화계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술성만 좇는 프랑스나 유럽식 영화제작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래서 간혹 할리우드 촬영장에서 거물 명감독과 촬영 방식에 대해 언쟁을 벌이는 등의 튀는 개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린의 대표적 배역은 ‘카지노 로얄’의 본드 걸 베스퍼 린드 역이다. 69 년 ‘여왕폐하 대작전’에 출연한 다이애나 리그 다음 두 번째로 본드 걸이 마지막에 죽는 역이다. 몇 해 전 한 영국 연예잡지가 역대 베스트 본드 걸 5명을 선정한 적이 있었다. 1위는 리그였고 그린은 5위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모두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본드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다.

공산권 해체 후 본드 영화도 무력감
첫 작품 ‘닥터 노’로 시작한 007 영화는 평균 2년 주기로 제작됐다. 그런데 공산권 해체가 시작된 89년에 개봉한 ‘살인 면허’ 이후 무려 6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95년 후속편 ‘골든 아이’가 나왔다. 냉전이 끝나 주적이 없어 허탈해진 스파이 세계와 같이 본드 영화도 무력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냉전기 007 영화에서 본드는 핵무기로 지구 파괴, 세계 금시장 독점, 동서 양 진영 핵잠수함 탈취 등을 획책한 스케일이 큰 적들과 싸웠다. 그런데 공산권 해체 후에 나온 본드 영화에선 마약상, 악덕 미디어 총수, 환경파괴범, 상사와의 불화로 변절한 전직 MI6 요원 등 상대적으로 지질한 적들과 대결했다.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의도인지 모르지만 본드 걸을 맡은 배우도 점점 무명이 많아졌다. 정보기관의 속성과 같이 첩보영화계도 거대한 주적과의 첨예한 국제적 대결구도하에서 보다 짜임새 있는 설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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