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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패자의 품격

중앙선데이 2012.11.11 00:29 296호 31면 지면보기
“패배는 여러분이 아닌 나의 몫입니다. 오늘밤, 실망감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힘차게 전진합시다.”

2008년 11월 4일 오후 11시 애리조나주 피닉스 빌트모어 리조트.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연단에 올랐다. 승복 연설을 하기 위해서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됐음을 알리는 언론 보도가 나온 지 15분 만이었다. 오바마 당선인을 “나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의 지지자들이 오바마 당선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큰 소리로 야유를 보냈지만 매케인은 오히려 그럴 때마다 두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러면서 “방금 오바마에게 축하 전화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며 “우리의 차이가 무엇이든 우리는 같은 미국인”이라며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지지자들도 곧 그의 말을 경청하며 박수로 화답했다. 매케인은 “가족들에게 앞으론 더 조용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할 수 있겠다”고 농담하며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패자의 우아한 퇴장은 승자의 영광만큼이나 큰 박수를 받았다.

이 같은 장면은 지난주에도 반복됐다. 밋 롬니 후보는 523일간의 선거 대장정을 5분간의 승복 연설로 마무리 지었다. 지지자들을 향해 “감사하다”는 말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며 운을 뗀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나라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를 기도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표정엔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롬니 역시 매케인만큼이나 우아한 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과 같이 결정적인 순간엔 당파 싸움이라는 모험을 할 여력이 없다”며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정략 이전에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전체 득표율로는 불과 2%포인트 차이로 진 그로서는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터다. 선거인단 제도에 대한 불만도 마음속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만 대신 희망을 이야기했고 남의 탓을 하는 대신 감사를 표현했다. 지지자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미소를 보내며 퇴장한 그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던 이유다.

승복 연설은 미 대선의 백미다. 패자의 품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전에선 이전투구를 벌이더라도 결과가 나오면 깨끗이 인정하고 승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축하한다. 승자 역시 패자의 승복 연설이 끝나기까지 기다린 뒤 승리 연설을 하는 것이 오랜 관례다. 이런 패자의 품격이 곧 미국 정치의 저력인 셈이다.

우리는 어떤가. 2007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경선 후보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패한 뒤 “경선 과정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자”고 한 것은 지금도 회자되는 승복 연설이다. 그러나 실제 결전에서의 승복 연설 중 매케인이나 롬니처럼 울림이 큰 것이 있었던가. 잘 이기는 것만큼이나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다음 달 19일 대한민국에서도 감동 넘치는 승복 연설 장면을 보고 싶다. 현재로선 투표용지에 누구의 이름이 적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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