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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5> K2 (하)

중앙일보 2012.11.02 04:04 Week& 6면 지면보기
K2베이스캠프(5150m)에 닿았다. 파키스탄 북부 도시, 스카르두(Skardu)에서 길을 나선 지 꼬박 열흘 만이다. 완벽한 원뿔 모양의 검은 거벽은 카라코람을 호령하듯 서 있었다. K2는 현지 말로 초고리(Chogori), ‘산 중의 산’이라는 의미다. 산 아래는 매년 카라코람의 제왕, K2의 정상에 발을 딛고 싶은 호기로운 산악인들이 모여든다.



잿빛 거벽 사이로 동이 튼다, 히말라야가 눈을 뜬다

K2(왼쪽)와 브로드피크 사이로 고드윈 오스틴 빙하가 흐르고 있다. 동쪽 브로드피크에서 쏟아진 햇볕은 빙하 서벽 상단부터 금빛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빙하 전체를 밝힌다.


히말라야의 선물, 따사로운 아침 햇살



고드윈 오스틴 빙하 중간에 있는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4900m)에서 K2베이스캠프까지는 8㎞ 남짓이다. 현지 포터들은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손사래를 쳤다. 현지인의 발걸음과 트레커의 속도는 ‘황새와 뱁새’ 차이다. 또 ‘낮에 오버페이스를 하면 밤에 고소증세가 찾아온다’는 잠언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긴 해도 이전에 비해 짧은 거리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했다. 여태까지는 오전 5시쯤에 일어나 침낭과 텐트를 접고, 아침을 먹고 7시쯤이면 길을 나섰다. 한낮의 땡볕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새벽안개처럼 움직이는 포터들에게 해가 뜨기 전에 짐을 싸서 줘야 하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하지만 K2로 향한 지난 7월 10일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다.



브로드피크의 세 봉우리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고드윈 오스틴 빙하로 쏟아져 들어올 때쯤은 히말라야 트레킹 기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며,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동쪽에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해는 빙하 서벽 상단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떠오른다. 지난 2007년 로체샤르(8400m) 원정 때 엄홍길 대장은 베이스캠프에서 “티끌 한 점 없는 아침 볕은 히말라야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가슴을 동쪽으로 향하고 아침 햇살을 받았다. 눈부신 햇살에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엄 대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밤새 텐트 안에서 굼벵이처럼 움츠리고 있다가 맞는 아침 볕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K2는 어김없이 설연(雪燃)을 뿜고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구름은 카라코람의 거인 허리를 에둘렀다. 높이에 따라 여러 개의 층을 이룬 구름은 산봉우리에 색동저고리를 입혀 놓은 듯했다. 구름은 빠르게 흘러갔다. 가이드 알리(31)와 조리사 사카와(26)는 “이런 날은 맑게 갠 K2를 볼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K2를 잘 보기 위해 캠프 주변 눈 언덕으로 올라갔다. 신설이 쌓인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K2를 향해 200㎜ 망원렌즈를 들이대고 있을 때였다. 까마귀 2마리가 들어왔다. 부리에서 발톱까지 새까맣다. 고산에 사는 까마귀는 영물이다. 예전 어느 산악인으로부터 해발 7000m에 설치한 캠프에서 통조림을 물고 와 계곡에 떨어뜨려 내용물을 주워 먹는 놈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1 K2베이스캠프에 당도한 트래킹팀. 7~8명의 포터와 가이드, 조리사가 모두 모였다. 2 지난 7월
10일 신설이 내린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의 아침. 3 고드윈 오스틴 빙하의 얼음 계곡.


해발 5000m에서 만난 까마귀 한 쌍. 암수일까, 아니면 어미와 새끼일까. 온통 새까만 녀석들은 밤새 내려앉은 신설 위에서 극명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누가 까마귀를 곁에 두지 못할 새라고 했나, 아름다운 새였다. 녀석들은 열 발짝 앞에서 망원렌즈를 겨누어도 모르는 채 교태를 부렸다. 옆구리를 바짝 대고 서로 몸뚱이를 비비다, 검은 부리를 나란히 하고 함께 먼 산을 쳐다보기도 했다. 급기야 긴 부리를 대고 입맞춤까지 했다. 처음엔 부리를 쪼아대는 건가 생각했지만, 한참이나 입을 맞추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까마귀는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새였다.



까마귀 한 쌍의 데이트를 구경하는 사이, 보조 조리사 유수프(30)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보스, 브렉퍼스트(Boss, Breakfast)”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예정된 식사 시간이 훨씬 지났다. 어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 마당에 넋 놓고 까마귀만 쳐다보고 있는 ‘고객’에게 짜증을 낼 법도 하지만, 그는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밥 생각이 없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밥상이라고 해봐야 중국산 쌀로 지은 푸석푸석한 밥과 한국에서 가져온 장아찌 한두 가지, 채소 볶음 그리고 미역국 또는 된장국 중 한 가지가 놓여 있을 것이다. 트레킹이 열흘 이상 가면 현지 조리사들이 내놓는 하루 세끼는 늘 ‘그 밥에 그 나물’이다. 그나마 아침마다 배급 타 먹듯 나오는 계란프라이가 별식이다.



K2(왼쪽)에서 보낸 하룻밤. 달빛과 별빛을 받은 설사면이 어둠 속에서도 환하다.


‘저 산을 봐라, 안 갈 수가 있나’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카라코람의 제왕 K2는 구름 치마를 벗고 있었다. 원뿔 모양의 검은 벽이 얼음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정오가 넘어서면 다시 구름에 휩싸일 것이다. 5000m 이상에 자리한 빙하의 날씨는 심히 변덕스럽다. 밤새 내린 신설은 쨍한 햇살에 수증기로 날아가 이내 흰 구름으로 변한다. 손에 잡힐 듯 낮은 구름은 7000∼8000m의 산을 넘지 못하고 계곡 안을 맴돌다 무거워지면 다시 눈으로 내린다. 항아리 속 같은 빙하의 계곡은 볕이 쨍할 때 섭씨 영상 20도, 구름이 해를 가리고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하면 금세 0도 근방까지 떨어진다. 배낭에 여벌의 우모복과 상·하의 바람막이가 있어 변덕스러운 날씨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가끔 눈이 아닌 비를 만나기도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일정이 길어질수록 혼자 하는 시간이 많다. 각자의 체력과 보행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간격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날랜 포터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면 동료 둘은 30분가량 뒤처져 있다. 빙하의 얼음을 살짝 덮고 있는 잿빛 바위와 자갈에 시선을 고정하며 혼자 걸었다. 지난한 여정의 종착지인 K2베이스캠프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앞만 보고 걷는 길, 무념무상이다. 머리는 비어 있더라도 다리는 민첩해야 한다. 너덜지대는 얼음 위에 자갈이 떠 있는 형태여서 자칫 몸의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소재의 신발과 가벼운 금속지팡이 2개를 준비하는 게 좋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현지 포터들은 고무신 한 켤레와 버드나무 지팡이로 대신한다.





고드윈 오스틴 빙하의 상단은 인더스강 지류인 브랄도(Braldo)강의 발원지. 그 너머는 중국 땅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뜻밖에도 환대를 받았다. K2에 도전장을 낸 산악인 김홍빈(48)·김미곤(40)씨가 캠프를 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김홍빈씨는 점심 메뉴로 콩국수를 준비했다. 그는 지난 1991년 북미 매킨리(6194m) 등반 도중 동상에 걸려 7번의 수술 끝에 열손가락을 모두 잘라야만 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2009년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고, 이후 8000m 14좌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K2 등반에 성공하게 되면 7개를 남겨두게 된다. 몽당자루가 된 손이지만, 움직일 수 있는 몇 ㎝의 손가락 밑동에 포크를 끼워 콩국수를 떠 먹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싱글벙글이다. 콩국수 말고도 등반 도중 중간 캠프에서 먹을 별식으로 “팥칼국수·비빔국수·떡국을 준비했다”며 고소 음식에 대한 노하우를 한참이나 늘어놨다.



베이스캠프에서 등반 일정을 확인하고 있는 산악인 김홍빈씨(오른쪽).
“산이 그렇게 가고 싶으세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 죽어부러슨께 나라도 가야지요, 허허허.”



지난해 사고를 당한 고(故) 박영석 대장, 2007년에 유명을 달리한 고(故) 오희준씨와는 각별한 인연이었다.



“나도 맥킨리에서 손가락 안 나갔으면 벌써 가부렀을랑가 몰라요. 나도 그때 단독 등반한다고 나대고 다녔으니까. 기고만장했지요. 남들이 안 한 것, 남들이 안 하는 방식으로 등반하고 싶고. 근데 이제야 산을 좀 알겠어요. 손이 이러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지요. 기왕 시작한 것 14좌를 하고 싶습니다.”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사이,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석양을 받은 K2의 서쪽 능선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김홍빈씨가 탄성을 질렀다.



“캬아~. 저 아름다운 능선을 보십시오. 저걸 보고도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안 가고 싶으세요? 내가 손가락만 있었어도, 피켈 한 자루만 쥘 수 있으면 지금 혼자서라도 올라가불 것인디.”



손가락이 없는 그는 고산 등반에서 꼭 필요한 벨트를 혼자서 찰 수 없으며, 등강기를 잡을 수 없다. 특수 제작한 등강기와 셰르파의 도움을 받아 4박5일을 등반한 끝에 지난 7월 31일 K2 정상에 올랐다. 열 손가락이 없는 상태로 히말라야 14좌에 도전하는 산악인은 그가 유일하다.



카라코람(파키스탄)=김영주 기자

사진=이창수(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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