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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무자식 상팔자’

중앙일보 2012.11.02 00:51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50대 부부가 일본 여행을 떠났다가 사이만 나빠져 돌아왔다. 남편은 여행 중 돈이 아깝다며 아이스크림과 돈가스를 안 사준 부인에게 화가 났다. “평생 뼈 빠지게 일했는데 1만원짜리 돈가스 하나 맘대로 못 먹는”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서다. 반면 부인은 여행 내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이드한테 들러붙어 온갖 재롱을 부린” 남편 때문에 여행을 망쳤다 했다. 두 사람이 털어놓는 ‘같지만 전혀 다른’ 여행의 기억.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으로 대표되는 ‘기억의 주관성’이라는 테마를 능청스레 툭 던지며 시작하는 이 드라마, 역시 범상치 않다.



 JTBC에서 지난달 27일부터 방영되는 주말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정을영 연출)는 ‘김수현’이라는 작가의 재능이 70대에 들어선 지금도 건재함을 증명한다. 80대 노부부와 아들 삼형제, 그리고 손자에 이르는 방대한 3대 가족의 캐릭터가 단 2회 만에 생생하게 드러났다. 어눌하지만 착한 큰아들, 투덜이 둘째, 철없는 셋째로 이뤄진 이 가족을 마치 오랜 기간 옆에서 지켜봐 온 느낌이랄까. 거기에 남부러울 것 없던 딸이 미혼모가 되어 나타난다는, 앞으로 이 가족을 덮치게 될 엄청난 사건을 살며시 얹어주는 것만으로 다음 회의 전개를 기대하게 만든다.



JTBC 주말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 마디마디에 박힌 디테일도 놀랍다. 패션 디자이너 간호섭 교수가 트위터에 적은 감상을 빌리자면 “대화 중 무심코 ‘동서 물 좀 줘’라는 (대사가 튀어나오는) 섬세함”이다. 특히 수십 년간 이어진 남편의 ‘네버엔딩 잔소리’를 “배냇병”이라 치부하면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정원의 잔디에 화풀이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비슷한 나이대를 살아 본 노작가가 아니고선 표현하기 힘든 장면. 삶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황당한 설정으로 덮기에 급급한 요즘 드라마들 사이에서, 김수현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일한 흠이라면 너무 리얼한 탓에 ‘가족 드라마’임에도 가족이 다 함께 보기 껄끄럽다는 것일 게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제목만으로도 엄청난 기대를 표출하던 엄마, 첫 회가 끝나자마자 “드라마 너~무 재밌더라”는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가 드라마의 어느 지점에 ‘폭풍 공감’했을지 예측 가능했기에, 차마 답장을 보낼 수 없더라는 불편한 진실. 극중 이 가족이 그려내는 상처와 원망의 촘촘한 거미줄에서 자유로운 가족이 얼마나 될까. 그러니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는, 식구들이 다 함께 모여 이 드라마를 보겠다는 ‘무모한 도전’은 피하는 게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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