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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아, 그리운 허 본좌 !

중앙일보 2012.10.30 00:39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철호
논설위원
야권 단일화가 다른 이슈들을 빨아먹는 블랙홀이 됐다. 한 달째 지지율이 꽉 막힌 따분한 선거판이다. 거기가 거기인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이하 경칭 생략)의 깨알 같은 공약들….도대체 차별화가 안 된다. 이렇게 허전한 선거 때면 간절히 그리워지는 분이 계시다. 그 별명도 거룩한 허 본좌, 바로 허경영 후보다. 허 본좌와 비교하면 박·문·안은 작은 감자로 보인다. 그분의 발밑에 까마득히 못 미친다. 그분은 5년 전, 애굽의 시나이산에서 계시를 받은 모세처럼 나타나셨다. 그리고 돌판에 불로 새긴 10계명 같은 공약들로 우리 머리를 내리치셨다.



 안철수는 “국회의원 100명을 자르자”고 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라 잽만 날렸다. 그나마 제대로 반박한 쪽은 심상정과 노회찬이다. “학교 폭력 줄이자고 학생 수 줄이자는 거냐”고. 좀 더 연장하면 “유신으로 국회를 해산한 박정희야말로 영웅”이란 뜻도 되겠다. 하지만 짧은 생각들이다. 허 본좌는 통 크게 “국회의원 200명을 자르겠다”며, 미개한 국회에 “출마고시를 도입하겠다”고 분노하셨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의지는 바위처럼 굳었다. 드디어 “정당은 죄다 없애고,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시키겠다”고 화끈하게 다짐하셨다.



 허 본좌에 비하면 “비정규직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문재인의 공약은 쩨쩨하다. 그분은 모든 비정규직에게 월급 150만원 이상, 그리고 중소기업 근로자에겐 매달 100만원의 쿠폰을 약속하셨다. 또한 “노조 시위는 무조건 무기징역으로 다스린다”고 하셨다. ‘기업 프렌들리’로 과감한 투자를 이끌어낸다는 복안 되시겠다.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걱정 붙들어 매시라. 오히려 허 본좌는 직접세를 싹 없앤다는 보너스 공약을 얹어 주셨다. 그리곤 박·문·안과 똑같이,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국가예산을 줄이면 다 된다”는 센스 있는 해법을 내놓으셨다. 이건 돈이나 숫자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마치 떡 5개와 생선 2마리로 5000명을 먹여 살린 예수님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처럼….



 다른 후보들이 소통과 화합을 말할 때, 그분은 해방을 이야기하셨다. 이른바 5대 해방이다. ①시험 해방=학생들은 한 과목만 공부하면 된다 ②결혼 해방=바로 1억원 준다 ③등록금 해방=반값이 아니라 완전 공짜다 ④군대 해방=징병제 폐지 ⑤취업 해방=청년은 죄다 국가인턴으로 채용한다…. 어디 이뿐이랴. 투표 시간 연장 논란도 5년 전에 이미 내다보셨다. 그래서 미리 15세까지 선거권을 주시고, 국민이 원한다면 ‘무한 투표’까지 허용할 기세였다. 이렇게 친절하게 ‘맞춤형 구원’을 약속한 정치인을 본 적 있는가.



 따지고 보면 ‘예능 정치’의 저작권도 허 본좌의 소유다. ‘힐링캠프’나 ‘○○콘서트’보다 훨씬 먼저 예능 무대에 섰다. 직접 ‘라잇 나우’ 콘서트를 여시고, ‘콜미(call me)’를 부르셨다.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내 이름을 불러봐 넌 시험 합격해, 살도 빠지고, 키도 커지고, 더 예뻐지고….” 88만원 세대를 넘어 온 국민의 절망을 어루만지는 노래였다. 곧바로 음원 차트 상위권을 휩쓴 건 너무 당연하다. 그분은 이듬해 싸이가 ‘라잇 나우’를 발표해 표절 시비를 불렀지만, 별말씀 없으셨다. 그의 통 큰 양보가 없었다면 오늘의 ‘강남스타일’ 신드롬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마치 단일화가 전부인 양 18대 대선판이 쪼그라들었다. 세 후보 모두 토론회를 무서워하는 겁쟁이들이다. 자꾸 샅바싸움만 하고 외곽을 빙빙 도니, 유권자는 하품만 난다. 허 본좌는 전혀 토론을 겁내지 않았다(단지 법적으로 거부당했다). 또한 지지율 0.4%의 환란 속에서도 당당히 완주해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후보 단일화나 정치 꼼수에는 눈길조차 안 준 대인배(大人輩)였다. 문·안도 하루빨리 단일화를 결판냈으면 한다. 세 후보는 빨리 합동토론회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유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미국 대선도 토론회로 승부 짓지 않는가. 불행히도 허 본좌는 ‘박근혜와 결혼설’로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바람에 19대 대선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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