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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키기도 아까워' 심신을 안정시키는 달콤 술

중앙일보 2012.10.29 03:17 건강한 당신 9면 지면보기
1 용수가 박혀있는 술덧. 용수 안으로 맑은 술이 괸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 계절의 변화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새순 돋는 봄, 소나기 내리는 여름, 황금 들판의 가을, 눈보라 치는 겨울을 여유 있게 즐길 줄 알아야 세월도 마디게 흘러간다. 옛사람은 가을엔 햅쌀로 빚은 신도주를 즐겼고, 음력 9월 9일 중앙절에는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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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열·항염 작용 지초 넣은 진도 홍주, 김정호도 감탄



머리 맑게 하고, 심신 안정시키는 국화주



자희향 국화주 발효실. 용수를 이용하여 술을 걸러낸다.
국화는 진달래와 함께 우리 술에 많이 들어가는 꽃이다. 국화주는 단맛이 도는 감국을 사용한다. 감국은 머리를 맑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국화주는 맑으면서도 노르짱한 빛이 도는데,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국화향이 난다. 단맛이 강하지만, 마시고 나면 금세 단맛의 기운이 입안에서 사라진다. 감미료가 아닌 찹쌀에서 우러난 단맛이라 끈적거림이 입안에 남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가을밤에 한잔술을 즐긴다면 단연 국화주가 될 것이다.



 국화가 들어간 술로 함양 국화주, 한산 소곡주, 계룡 백일주, 안동 송화주가 있다. 특히 전라남도는 매달 남도 전통술을 지정한다. 10월 전통술로는 자희향 국화주를 선정했다. 이 국화주는 2004년부터 시작된 함평 국화 축제 ‘국향대전’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멥쌀로 죽을 쑤고,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전통 누룩과 섞어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킨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삼키기도 아깝다’는 뜻을 지닌 석탄향 기법을 응용했다. 국화는 덧술할 때 들어가는데, 은은한 국화향을 잡기까지 꼬박 2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술 거르는 것도 기계식 압착기를 사용하지 않고, 대오리로 만든 용수를 술덧 속에 질러 넣어 맑게 괸 부분만 떠낸다. 전통기법을 살린 수제품이라 생산량이 적다.



산삼에 버금가는 지초 넣은 진도 홍주





전통적으로 남쪽 지방에서는 소주보다는 탁주를 많이 소비했고, 술이 상하기 쉬운 여름에만 소주를 내려 마셨다. 하지만 전남을 대표하는 술은 뭐니뭐니해도 진도 홍주다. 진도 사람이면 죄다 홍주를 내릴 줄 안다고 말할 정도다. 진도 홍주는 계절적 특성보다 섬의 특성이 더 반영돼 있다. 유배 온 선비는 홍주로 위안을 받았고, 바닷가 사람들은 홍주로 억센 노동을 위로받았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일찍이 진도 홍주를 맛보고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 풍경이로다”고 읊었다. 진도 홍주가 붉은 것은 지초라는 약재 성분 때문이다. 홍주에선 지초 특유의 목재향이 나고, 술맛은 쓰고 묵직하면서도 날카롭다.



 진도 홍주는 쌀과 보리를 섞어 밥을 짓고 이를 누룩과 섞어 발효시킨 뒤에 증류해 얻는다. 증류할 때 지초를 거치지 않으면 투명한 소주가 만들어진다. 독한 소주는 몸이 상할까 봐 걱정되는 술이라 가양주로 존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진도 사람은 산삼에 버금간다는 지초를 넣어 홍주를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진도의 민가에서는 어린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면 지초 생즙을 참기름에 개어 먹이는 관습이 있었다. 지초는 성질이 차서 열을 내리고 독을 풀며, 염증을 없애는 작용이 뛰어나다고 한다. 지초에 들어 있는 항균·항염 기능의 시코닌 성분 때문이라고 밝혀졌다. 현재 진도홍주 제조장은 여섯 군데가 있다. 각자의 제품을 만들면서 군수 품질 인증 공동브랜드인 루비콘도 만들고 있다.



발효 과정에서 두충·하수오 등 듬뿍



전남의 술 중에서 약효를 극대화시킨 술이 담양 추성 고을의 추성주와 댓잎술이다. 추성 고을은 가을 산이 아름다운 담양 추월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엔 술 빚기 체험장도 있다. 댓잎술은 약주, 추성주는 증류주다. 추성주는 발효 과정에 두충·창출·육계·우슬·하수오·연자육·산약·강활·의이인·독활이, 이를 증류한 뒤에 오미자·구기자·갈근·홍화·음양곽·상심자 등이 들어간다. 약재 가짓수를 보면 술을 빚으려 한 것인지 약을 지으려 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추성주의 연원은 사찰 연동사에 두기도 하고, 담양 지역에 떠돌던 제세팔선주라고도 한다. 대체로 사찰 술과 관련 있는 술이나, 이름에 신선이 들어가는 술도 약재가 많이 들어간다. 이때 술 속의 신선은 약재를 뜻한다. 즉 칠선주는 일곱 가지 약재, 팔선주는 여덟 가지 약재가 들어간 데서 생긴 이름이다.



 담양 추성주 제조장에서 담양 온천과 담양 금성산성이 멀지 않다. 담양호를 발 아래 내려다보면서 걷는 금성산성 성벽길은 아찔하고 웅장하다. 금성산성 성벽길을 돌며 가을을 만끽해 보자. 그리고 산 밑에 내려와 추성고을 약주인 푸른 댓잎술로 목을 축이면 가을이 벽화처럼 가슴에 새겨질 것이다.



 글·사진=허시명



(농림수산식품부 지정 우리 술 교육 훈련기관 ‘막걸리 학교’ 교장, 『막걸리, 넌 누구냐?』 『술의 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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