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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급 공무원 '76억 횡령' 가능했던 이유가…헉!

중앙일보 2012.10.29 01:34 종합 14면 지면보기
전남 여수시의 8급 공무원 김모(47·구속)씨가 공금 76억원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수시는 전산 시스템을 제쳐놓고 직원 급여 등 거액의 공금 입출납을 수기(手記)에 의존해 온 것으로 취재결과 확인됐다. 또 급여 관리를 단 한 명의 직원에게 맡겨 상호 감시가 불가능했던 것도 말단직원의 횡령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3년째 김씨의 횡령을 적발해 내지 못한 허술한 감사 시스템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컴퓨터보다 수기가 정확” 8급에 놀아난 여수시
76억 + α 세금도둑 키운 부실한 회계·감사 시스템
국가 전산시스템 사용 안 해 근소세 등 횡령 방조한 셈
3년간 10여 번 감사했지만 한 번도 문제점 발견 못 해

 2009년 7월 1일 김씨는 여수시청 회계과로 발령받았다. 4년 동안 회계과에서 근무하다 8급으로 승진해 동사무소와 총무과, 민원실 등에서 근무한 지 3년 만이었다. 그에게 회계과 복귀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복귀 열흘도 지나지 않은 9일, 김씨는 여수시 상품권 환급액 1430만원을 빼돌렸다. 물품판매대금으로 현금 대신 여수상품권을 받은 상점 주인들에게 현금으로 교환해 주면서 액수를 부풀려 장부에 기재하고 차액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은 것이다. 2주 뒤인 7월 20일부터는 직원들의 급여에까지 손을 댔다. 원천공제되는 근로소득세를 부풀린 것이다. 3년 동안 그의 횡령액수가 76억원으로 불어나기까지 아무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다. 김씨는 이렇게 빼돌린 돈을 부인 김모(40·구속)씨의 사채 놀이 자금과 곗돈 불입에 쓰고 자신과 친·인척 명의로 된 아파트 4채도 샀다.



 문제는 수기 회계에 있었다. 여수시는 2008년부터 일반 회계와 특별 회계의 경우 전국 공통의 지방재정전산시스템인 ‘e-호조’를 사용하고 있다. 예산과 지출, 계약, 부채 등 지방재정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시스템은 상시 모니터링이 가능해 횡령 사고 등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김씨가 담당했던 ‘세입·세출외 지출’ 부문에는 이 시스템이 사용되지 않았다. 상급자가 수차례에 걸쳐 전산 사용을 독려했지만 김씨는 “수기로 하는 게 전자 시스템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다”고 버텼다. 베테랑 회계직원인 김씨의 말만 믿은 여수시는 그의 횡령을 방조한 꼴이 됐다. 김씨는 돈을 빼돌릴 때마다 허위 입·출금 내역을 수기로 작성하거나 공문서를 위조했다. 정병재 여수시 부시장은 “직원들의 급여지급과 상품권 직무를 맡은 김씨가 공문을 위조하면서 돈을 빼돌렸으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수박 겉핥기식 감사도 결과적으로 김씨의 횡령을 도운 셈이 됐다. 김씨의 범행이 이뤄진 3년1개월 동안 여수시 회계과는 총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감사를 받았지만 단 한 차례도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2년마다 실시되는 전남도 정기 감사와 매년 11~12월에 이뤄지는 여수시의회의 행정사무감사(세 차례), 매년 5월 의회결산검사(세 차례) 등이 모두 무위로 끝났다.



 여수시는 올 9월 26일 김충석 여수시장의 지시로 회계과를 특별 감사했다. 김 시장은 당시 감사담당관을 불러 “간밤에 ‘회계과에 엄청난 부정비리가 있으니 잡아내라’는 무서운 꿈을 꿨다”며 감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 감사에서도 김씨의 횡령을 잡아내지 못했다. 김씨의 범행은 이달 초 현지감사를 실시한 감사원 감찰정보단에 의해 꼬리가 밟혔다.



 여수시가 이처럼 부실한 회계·감사 시스템을 운영해 온 사실이 드러나자 시청 공무원 가운데 누군가가 김씨의 부정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금품을 받고 도와줬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광주지검 순천지청 관계자는 “김씨가 상급자에게 상납을 했는지 등 다른 공무원의 연루 여부를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여수=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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