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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아 3000명 키워낸 ‘지즈코’ 여사

중앙일보 2012.10.29 00:40 종합 30면 지면보기
윤학자 여사의 피아노 연주 모습을 확대한 판넬 앞에서 외손녀인 정애라 원장(오른쪽)이 아이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윤학자
목포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유달산 자락에 공생원(共生園)이란 이름의 아동복지시설이 있다. 오갈 데 없는 초·중·고교생과 대학생 71명이 이름처럼 더불어 사는 곳이다. 27일 낮 공생원 사람들은 낡은 강당에 옛 사진들을 걸고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을 꾸미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31일이면 이곳에서 국경을 초월해 사랑을 실천한 윤학자(尹鶴子·1912~68) 여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31일 윤학자 탄생 100주년
한국인과 결혼, 공생원 꾸려
목포·서울, 일본 고치현서 양국민 함께하는 추모행사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린 그는 본명이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인 일본 여성이었다. 7세 때인 1919년 목포시청 관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왔다. 목포여고를 졸업한 뒤 교사로 근무하던 중 공생원에서 음악과 일본어를 가르칠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자원했다. 공생원은 기독교 전도사였던 윤치호(1909~?)가 28년부터 거리를 떠돌며 동냥하는 아이들을 데려다 보살피던 곳이다.



다우치는 윤 원장과 사랑에 빠져 38년 결혼하고 이름도 윤학자로 바꿨다. 부부는 친자식 4남매를 원생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이고 같은 옷을 입혀 길렀다. 45년 광복 후 일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부 주민이 해꼬지를 하려 들자 원생들이 “우리를 키워 준 어머니를 손대려면 우리부터 죽여라”고 막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 남편 윤 원장이 전남도청에 식량 구호를 요청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후 공생원 살림은 윤 여사 혼자 도맡아야 했다. 전쟁 고아가 많은 시절, 한꺼번에 500여 명을 키울 때도 있었다. 그는 56회 생일인 68년 10월 31일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목포시는 사상 첫 시민장으로 그의 사랑과 희생 정신을 기렸다. 목포역 광장엔 3만 명의 추도객이 모였다. 그녀의 손을 거쳐 성장한 고아의 수는 3000명에 이른다.



 공생원과 윤 여사의 이야기는 95년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으로 만들어졌다. 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일본 총리는 윤 여사의 인생을 다룬 NHK 프로그램을 보고 수시로 공생원에 전화를 걸어 격려했다. 또 평생 한복을 입고, 한국인으로 산 고인이 숨을 거두기 직전 “일본의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0년 매화나무 20그루를 보내기도 했다.



 윤학자 여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목포·서울과 그의 고향인 일본 고치(高知)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29일 서울 여성플라자에서는 학술심포지엄과 ‘사랑의 묵시록’ 감상회가 개최된다. 30일과 31일에는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한·일 사랑과 평화의 제전’이 열릴 예정이다. 이들 행사에는 오자키 마사나오(尾崎正直) 고치현 지사 등 500여 명의 일본인도 참석한다. 다음 달 9일에는 고치에서도 탄생 100주년 기념식과 부조상 제막식을 한다.



 윤 여사의 장남 윤기(70)씨는 일본 사카이(堺市)·고베(神戶)·교토(京都) 등 3곳에 재일동포 노인들을 위한 양호시설 ‘고향의 집’을 세우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사회사업에 투신하고 있다.



목포=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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