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성 눈물로 지은 폭군의 유적, 백성 먹여살리는 역설

중앙일보 2012.10.26 03:20 Week& 4면 지면보기
황제의 키는 1m53㎝였다. 자기보다 큰 사람은 절대 등용하지 않았다. 과연 조각(組閣)이 가능했을까 싶지만 그렇게 36년(1848~83)을 재위했다. 황제는 후궁, 즉 첩을 103명이나 뒀다. 그러나 전립선에 문제가 있어 정작 후손은 한 명도 없었다. 이젠 전설이 된 그는 베트남의 투득 황제다. 최초로 베트남을 통일하고, 칭제 건원을 한 응우옌 조(朝·1802~1945)의 4번째 황제다.


세계 문화유산 지정된 베트남 후에와 호이안

한때 베트남을 지배했던 응우옌 황조의 수도 후에에 있는 카이든 황릉. 카이든 황제는 11년에 걸쳐 자신의 묘를 만들게 했다. 황릉 내부는 금박과 도자기, 유리모자이크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사진 하나투어]


투득 황릉은 베트남 3대 도시이자 중부 최대도시인 다낭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후에에 있다. 응우옌 조가 수도로 삼은 후에의 궁과 능들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후에의 황릉 중 화려함으론 투득 황릉보다 12대 황제인 카이딘(1916~25)의 것이 한 수 위다.



금박과 도자기, 유리 모자이크로 치장한 건물과 튀어나올 것같이 거무스름한 계단의 검은 용 조각이 압권이다.



두 황릉은 모두 백성의 눈물로 치장했다. 투득은 자신의 능을 만드는 데 4년을 쏟고, 3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했다. 공적을 새길 20t짜리 비석돌은 50㎞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 왔다. 투득 황릉은 무덤이 아니라 별장에 가깝다. 연못엔 정자가 3개 있는데 하나는 낚시를 즐기기 위해, 다른 하나는 황비·후궁들과 시를 짓기 위해, 셋째 정자는 제비들을 노닐게 하느라 지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시신은 어디쯤 묻혔는지 미스터리다. 수백 명을 동원해 능 한쪽에 비밀 묘를 만들게 한 뒤 만든 이들을 몰살했다고 전해진다.



카이딘 황제는 한술 더 떠 11년에 걸쳐 베트남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무덤을 만들었다. 퇴임 후까지 이어진 대사역이었다. 그래서 카이딘 황릉의 공덕비 뒷면엔 한때 비난 낙서와 욕설이 가득했다. 투득 황제가 불임이었던 것처럼 카이딘 황제는 게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럼에도 폭군이 남긴 유적은 도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어 대사역에서 희생됐던 이들의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역사의 역설이다.



다낭에서 후에와 정반대쪽인 남쪽으로 가면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세계 각국의 무역선이 들고났던 호이안이 나온다. 국제무역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호이안은 1999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해가 저물기 전 호이안은 서울의 인사동 거리와 비슷한 풍경이지만 밤이 되면 진면목이 보인다.



거리마다, 다리마다, 가게마다 내건 형형색색의 등불이 강물에 어른거린다. 몽환(夢幻)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한국에서 후에와 호이안 두 곳을 찾아보려면 다낭 공항을 거쳐야 한다. 다낭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역사의 도시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국군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 다낭이다.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그런 다낭이 세월 따라 베트남 3대 도시로 성장했다. 군부대가 주둔했을 해안엔 하얏트·플라자 호텔 체인을 비롯해 5성급 호텔이 즐비하다. 도심엔 두산·롯데 등 한국의 기업 이름이 적힌 건물들도 보인다.



2012년의 다낭은 슬프지도, 어둡지도 않았고, 전쟁의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흉터까지 없어진 건 아니다.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미국과의 전쟁 등 아픈 과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은 베트남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낭의 하나투어 가이드 김대현씨는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실용주의가 그들의 ‘도이모이(doimoi·쇄신)’ 정신”이라고 말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