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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착한 판사’는 없다

중앙일보 2012.10.24 00:35 종합 38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가끔 귀갓길에 서울 서초동을 지날 때면 언덕 위 법원 청사를 바라보곤 합니다. 사건의 홍수 속에 밤늦게까지 남아 재판기록을 펼칠 수밖에 없는 판사들의 고단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일엔 재판을 하느라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와야만 하지요. “판사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그나마 대한민국 법원이 돌아간다.” 한 퇴임 대법관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법원 판결에 대해 거센 비난이 일 때마다 판사들이 느낄 당혹감을 이해합니다. 최선을 다해 재판하고 판결했는데 왜 반발을 하는 걸까. 무슨 이유로 판사를 신상털이 하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특정 진영을 위해 판결했다고 의심하는 걸까. 답답한 심정들일 것입니다.



 “그럼, 여론재판을 하라는 거냐”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헌법에 규정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가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여론에 따라’ 재판하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여론이 판결 하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황에서 재판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왜 여론을 무시하느냐”는 지적과 “너무 여론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지난 4월 경기도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납치해 살해한 우위안춘(오원춘·42)에 대한 2심 판결이 지난주 나왔습니다. 1심에서 선고됐던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낮춰졌습니다. 감형 이유로 “‘인육 제공 목적으로 범행했다’는 1심 판단의 근거가 약하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판사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판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을 영원히 박탈하는 사형은 극히 예외적인 형벌로 최대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피해자 수도 중요하다. 최근엔 피해자가 한 명인 살인범에 사형이 확정된 적이 없다. 잔혹하고 엽기적이긴 하지만 사체 훼손은 피해자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방법이 사용된 것과 다르지 않느냐.



 피해자 유족과 시민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더 끔찍해야 사형을 내리는 것이냐. 인육 제공 목적이 아니라는 판단이 잔인한 살인범의 형량을 감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피해자가 한 명이라도 그 죄질에 따라 다르게 봐야 한다. 판사들은 “무기징역은 종신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도소에서 20년 정도 복역하면 가석방으로 나올 수 있지 않느냐.



 국민과 판사들의 인식 사이에 큰 괴리가 느껴집니다. 저는 그것을 법 논리와 법 감정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위안춘 판결문을 보면 논리적으로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친절한 각주까지 붙어 있습니다. 다른 강력범죄자에 대한 판결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판례와 법리의 오솔길을 따라갑니다. 다만 결론에 이르면 한결같이 피고인의 불우한 환경, 반성하는 태도, 교화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흉악 범죄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 필요성은 그 뒤에 가려집니다.



 아무래도 법정에서 피고인을 직접 대면하고 있으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법관의 양심(良心)’이란 것이 착한 마음, 어진 마음만 뜻하는 건 아니라고 믿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법관의 양심엔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는 단호한 의지와 악(惡)에 대한 냉정한 분노도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판사들이 격렬한 트위터나 댓글에 상심하지 말고 그 밑에 흐르는 법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해주길 바랍니다. 국민의 법 감정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 결론에 맞지 않는다고 몰아세우는 여론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제 아무리 정교하고 훌륭한 법 논리도 국민의 법 감정과 동떨어져 있다면 울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많은 이들이 판사들에게 묻습니다. 피고인뿐 아니라 피해자 입장에도 서본 뒤 판결을 내리고 있는가. 법원 청사의 스크린도어에 갇혀 거리와 골목의 한숨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할 책임은 전국의 2715명 판사 모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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