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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메카 영국, 들여다보니 레저 강국

중앙선데이 2012.10.21 03:26 293호 22면 지면보기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가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된 8월 10일 트레이더들이 그 기념으로 맨유 유니폼을 입고 주식 거래를 하고 있다. [뉴욕=블룸버그 뉴스]
영국의 세계적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는 8월 10일 미국 뉴욕 증시에 주당 14달러 공모가에 상장됐다. ‘세계 최고 가치를 지닌 구단’(미 경제전문지 포브스 분석)으로 평가받아온 이 스포츠 기업은 시가총액 23억여 달러(약 2조6000억원)의 큰 비즈니스 회사가 됐다. 지난달 17일 개막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에서 맨유 등 소속 20개 팀이 유니폼 광고로 받는 돈은 총 1억4710만 파운드(약 2600억원)에 달한다. EPL의 TV 중계권은 2010~2013년 4년간 30억 파운드(약 5조6000억원)나 된다.

올리버 와이만(OW)의 ‘레저 경제학’ 보고서

영국 축구산업의 엄청난 규모를 단순히 ‘축구 종주국’이라는 점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프로축구는 일과 함께 여가를 삶의 핵심 가치로 인식하고 관련 산업을 키워온 이 나라 레저 인프라와 비즈니스 역량의 결정체일 뿐이다. 스포츠·관광·레크리에이션을 아우른 레저산업의 매출과 일자리 창출 효과는 금융을 웃돈다. ‘금융으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12월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의 큰 화두는 성장과 일자리다. 미국에 본부를 둔 다국적 경영컨설팅 업체 올리버 와이만은 최근 ‘영국 레저산업(The State of the UK Leisure Industry)’이란 보고서를 내놨다. ‘잘 노는 것이 잘사는 길’이라는데, 한번 따라가보자.
 
일자리와 성장 두루 책임질 新성장엔진
우리나라도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열리고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여가 선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레저’ 하면 다양한 그림을 떠올리지 못하는 한국인이 여전히 많다. 부유층이라면 환상적 해변가의 멋진 리조트나 호화로운 요트, 크루즈 여행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비용 부담 때문인지 등산·걷기·조깅·자전거·바둑·장기 등을 떠올리다가 금세 막히고 만다. 올리버 와이만 서울사무소의 신우석 이사는 “근래 캠핑 등 서구식 레저 문화가 자리 잡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해서는 그 종류와 규모가 턱없이 미흡하다”고 말했다.

영국 사람들은 ‘레저’라고 하면 폭넓게 연상한다. ▶스포츠 활동과 경기 관람 ▶레크리에이션·엔터테인먼트 ▶요식 ▶갬블링(도박)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올리버 와이만의 유럽 레저산업 리더인 이언 브라운 시니어 파트너(부사장급)의 말이다. “한국은 고도화된 지식 기반 선진경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레저는 즐기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라는 소모성 활동이 아니라 창의력 복원과 생산성 향상의 원천으로 간주해야 한다. 레저산업 발전을 민간과 시장에 맡기되 국가적으로도 도움을 줘야 한다.”

영국의 지난해 레저산업 총매출은 1170억 파운드(약 210조원)에 달했다. 유관 산업의 매출 유발 효과 1000억 파운드를 더하면 390조원에 달한다. 고용 기여도도 높다. 이 나라 일자리의 10% 정도는 레저산업이 만든다. 일반 제조업(8%)과 금융(4%)보다 비중이 크다. 특히 18~25세 젊은 근로자 중 21%를 점한다. 사회 초년생이 레저업종에서 겪는 건 직훈(職訓) 이외에 직장인의 기본 자세를 잡아주는 효과도 크다. 올리버 와이만 서울사무소의 정호석 대표는 “레저업종 경력자는 고객 서비스 마인드나 응대 수준이 높은 편이어서 소비재나 유통·금융 등 B2C(기업-고객 간 거래) 업종에서 선호하는 인력”이라고 설명했다.

레저산업의 여성 종사자 비중은 44%로, 여성인력 활용도도 높다. 레저업계 고용의 46%는 파트타임이다. 구직자 입장에선 고용의 안정성은 좀 떨어지지만 진입장벽이 낮다. 재정위기로 유럽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지만 영국 실업률은 8%로 유럽 평균 11%보다 낮다. 브라운 파트너는 “유로존 미가입국으로 근래 유로존 사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다는 점 이외에 레저산업의 고용 흡수력이 이에 한몫한다”고 설명했다.

영국 레저산업의 선도기업은 IHG를 우선 꼽을 수 있다. 객실 수 기준으로 세계 최대 호텔 체인인 ‘인터콘티넨털 호텔’ 브랜드를 소유한 그룹이다. 미국 디즈니에 이어 세계 2위 어뮤즈먼트(amusement) 그룹인 멀린(Merlin)도 눈에 띈다. 미 할리우드·뉴욕·라스베이거스와 홍콩 등 세계적 도시에 진출한 세계 최대 밀랍인형 전시관 ‘마담 투소 박물관(Madame Tussauds)’을 운영한다. 영국 수도 런던의 상징인 대형 회전 관람차 ‘런던 아이(London eye)’의 운영권도 갖고 있다. 유럽 최대 멀티플렉스 영화관 체인 ‘오데온(Odeon)’ 역시 유명한 영국 레저브랜드다.

맨유·첼시 등이 활약하는 EPL은 세계 프로축구의 종가다. 스폰서와 중계권료 등을 따지면 EPL 꼴찌 팀도 1000억원 안팎을 챙긴다. 그래서 우승팀 못지않게 시즌마다 EPL에서 탈락해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세 팀이 어디냐에 관심이 쏠린다. 독일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5월 열린 유럽 축구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파란 유니폼에 ‘SAMSUNG(삼성)’ 로고를 단 영국 프로팀 첼시가 독일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우승했다. 두 시간 가까이 2억 명 넘는 TV 시청자에게 첼시 유니폼이 노출돼 삼성은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삼성은 첼시 후원비용으로 한 해 1380만 파운드(약 246억원)를 쓴다.

영국 레저산업은 특히 중소기업 비중이 3분의 2에 이른다. 브라운 파트너는 “중소 레저업체들은 영국 내 공급사슬(supply chain) 곳곳에서 핵심 고리 역할을 하고, 지역경제와 고용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말했다. 영국 레저산업은 또 문화미디어스포츠부가 관장한다. 정부와 국회는 고용을 창출해 청년실업 문제를 덜기 위해 18~25세 인력을 고용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청년 벤처 사업가들이 레저산업에 많이 뛰어들 수 있게 창업펀드와 인큐베이션(창업보육) 서비스도 지원한다. 신우석 이사는 “영국은 일찍이 비틀스나 브리티시 록(British rock) 같은 세계적인 문화 콘텐트의 힘을 뿜어낸 적이 있다. 이런 자부심으로 레저 분야에서도 글로벌 강자의 위상을 세우려 한다”고 말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레저 강국 될 호기
그렇다면 한국 레저산업의 현주소는 어떨까. 신우석 이사는 “레저산업의 정의나 외연조차 불명확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레저산업 육성책이 간간이 나오지만 민관 합동으로 심도 있는 큰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영국을 교과서로 삼아 ▶즐길거리가 있는 곳 ▶저비용 고효율 ▶합리적 가격 ▶먹고 마시고 자는 원스톱(one stop) 인프라까지 총체적 전략 수립이 요망된다.

가령 빼어난 경관의 강과 산·바다가 산재한 반도국가 한국은 레저 강국의 입지를 충분히 갖췄다. 신 이사는 “엑스포를 치른 전남 여수의 시설과 행사 운영 노하우를 활용해 이곳을 레저 문화 복합콘텐트 단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내놨다. 특히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은 우리나라의 지형 자원과 우수 인력, 첨단 정보기술(IT)을 결합해 강원도를 세계적 겨울 레저 휴양지로 육성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대선 주자마다 일자리는 최우선적으로 강조하지만 정작 레저산업의 고용창출 잠재력을 읽는 안목은 엿보이지 않는다. 레저산업은 사회 초년생의 서비스 마인드를 제고할 수 있는 훈육장이기도 하다. 최근 양산되는 ‘니트(NEET)族’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ining’의 약자로 학생 신분도 아니면서 어디에 고용돼 있지 않고 직업교육조차 받지 않은 청년 실업자를 뜻한다. 한국이 21세기 동북아 금융·물류 허브로 도약하려면 레저산업을 외면할 수 없다. 신우석 이사는 “외국 자본과 인력을 지속적으로 유치해 오래 한국에 붙들어 두려면 즐길거리가 없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도움말 주신 분=올리버 와이만 서울사무소 정호석 대표, 신우석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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