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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여섯개 빠지며 석달간 걸은 26세 이혼女

중앙일보 2012.10.13 00:13 종합 35면 지면보기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은 26세의 셰릴 스트레이드는 배낭 하나 지고 4285㎞의 미국 서해안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홀로 걸었다. [사진 나무의 철학]


와일드

[책과 지식] 지치도록 걸었다, 발톱 여섯개 빠지며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나무의 철학

552쪽, 1만4800원




진솔해서 처절하고, 장엄하면서도 안쓰러운, 그래서 아름답기까지 한 논픽션이다.



 여행문학은 넓게는 에세이에 포함되지만 그 속을 파고 들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단 눈으로 쓰는 여행기다. 풍물과 경치를 보는 대로 담아 정보를 제공한다. 가슴으로 쓰는 여행 에세이도 있다. 감상과 성찰을 담아 공감을 자아낸다. 머리로 쓰는 여행기도 매력적이다. 역사와 문화를 다뤄 지식을 더해준다. 그런데 몸으로 쓰는 여행기야 말로 감동적이다. 맨몸으로 치열하게 부딪쳐 가는 모습에서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몸으로 기록한 여행문학이다. 석 달 넘게 걸려 홀로 4000㎞를 걸어낸 20대 미국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는 당시 막 이혼한 상태였다.



 작가를 꿈꾸던 지은이는 사랑에 빠져 1995년 열아홉 살에 결혼했다. 하지만 4년 전 엄마를 잃은 아픔에 낯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을 즐기고 마약까지 하는 바람에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파경을 맞았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던 엄마를 암으로 잃고 나서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혼 후 새로 정한 성(姓)이 ‘길을 잃다(strayed)’란 뜻이니 지은이가 처한 상황이 짐작 갈 것이다.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진솔함이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다.



 막장에 처한 지은이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걸쳐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홀로 주파하기로 마음먹는다. 안내서 한 권과 나침반에 의지한 채.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한데 PCT는 해발 2000m가 넘는 눈 덮인 능선과 찌는 듯한 사막이 공존하는 도보여행 코스. 게다가 지은이는 배낭을 메고 산을 타본 경험이 없는 초보다. 떠나기 전 7개월간 야외용품을 구입하고, 응급조치법이며 휴대용 정수기 사용법 등을 익힌 다음 6월 어느 날 캘리포니아 남쪽 끝에서 첫 발을 내디뎠다. 처절하지만 장엄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셰릴 스트레이드는 석 달 넘게 자신의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고행의 길을 걸었다.
 예상대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겨드랑이 방취제에 일회용 면도칼, 콘돔 뭉치까지 우겨 넣어 자기 몸무게의 절반 가까이나 나가는 배낭은 처음엔 일어설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 평균 20㎞ 넘게 걸어야 석 달 만에 주파할 수 있는데 경험이 없는 만큼 하루 10㎞ 남짓 걷는 게 고작이었다.



 등산화를 잃어버려 중간보급소까지 테이프로 만든 ‘신발’로 걷기도 했다. 발은 부르트고, 어깨는 배낭에 쓸리는 등 몸은 ‘깨진 유리잔’처럼 느껴졌다. 그 몸부림은 ‘PCT를 마칠 때 발톱 6개가 빠졌다’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와중에 길 위에서 자연을 배우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해 종내는 ‘PCT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는다. 물론 돈이 없다고 야영장에서 쫓아낸 부부나 스물여섯 살의 젊은 여성에게 지분거리는 남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인생 담금질’에 보탬이 됐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만큼, 그리고 매끈한 번역에 힘입어 여운이 남는 문장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내가 품은 여러 가지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놀라운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 말이다. 길가에 피어난 사막의 꽃 한 송이가 나를 간질이는가 하면 저 산들 너머로는 희미해지는 태양과 함께 장대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같은 대목이 그렇다.



 여러 미덕 덕분에 책은 한 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그러기에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란 마지막 구절은 더욱 울림이 크다.



 사족.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도 꼭 읽기를 권한다. 미국 동부에 있는 애팔래치안 트레일에 도전한 기록인데 유머가 넘치는 것이 이 책과는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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