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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병자호란 피난길에 ‘오금 아프다’ 말한데서 비롯

중앙일보 2012.10.11 04:04 2면
얼마 전 가을 햇살을 받으며 오랜만에 집 앞 오금공원에 들렀다. 계단을 몇 걸음만 올라도 바로 옆의 넓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한적한 산을 오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공원 안에는 유난히 오동나무가 많다. 자생적인 것인지 공원을 조성하면서 심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금동이라는 동네 이름에 걸맞다.


우리 동네 유래 송파구 오금동

‘김종서 대감이 하인을 업고 건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송파구 오금동 성내천의 현재 모습.


 오금동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져 온다.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나무로 장을 잘 짜는 목수와 가야금을 만드는 이가 살고 있어 오동나무 오(梧)와 비파 금(琴)이 합쳐져 오금골이 됐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청나라에 쫓겨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길에 이곳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신하들에게 ‘오금이 아프다’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오금골은 조선시대 이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해 있었고, 오금골을 비롯해 웃말·안골·개농리·누에머리 등 자연부락을 합쳐 오금리라 했다. 이후 서울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금동은 송파구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동쪽으로는 마천동과 경기도 하남시가 있다. 서쪽에는 가락동, 남쪽에는 거여동, 북쪽은 방이동 등과 각각 이웃하고 있다.



 오금공원 한쪽에 위치한 송파도서관 앞에는 서흔남 동상이 있다. 조선 중기 사람인 서흔남은 천민 출신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난 간 인조임금을 산 밑에서부터 남한산성 서문 안까지 업고 올라가 그 공으로 곤룡포를 하사 받았고, 죽은 뒤에는 별군관이란 벼슬까지 얻은 사람이다. 그의 무덤에는 임금에게 하사 받은 곤룡포가 함께 묻혔고, 그 후 서흔남의 묘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고 한다.



 오금공원에서 나와 오주중학교를 끼고 내려가면 오금동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성내천 물빛광장이 나온다. 성내천을 지날 때마다 이곳에 얽힌 옛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종수(金鍾秀) 대감이 늘그막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시골에 와 있었을 때의 일이다. 김 대감은 자주 냇가에서 낚시를 즐겼다. 어느 날 남한산성의 관원을 모시는 하인 하나가 한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내천을 건너야 했다. 발에 물을 적시기가 싫었던 하인은 자신을 업어서 내를 건너줄 사람을 찾았다. 문득 하인의 눈에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하인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나 좀 업어주시구려.” 김 대감은 갑작스런 일에 당황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인을 업었다. 아마 고려말 명신이었던 조운흘이 누런 소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을 태워줬던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 대감이 쓰고 있던 삿갓이 자꾸 하인의 목에 닿았다. 신경에 거슬린 하인은 노인의 삿갓을 벗겨 버렸다. 벗겨진 삿갓 사이로 정·종 1품이라야 달 수 있는 옥관자가 드러났다. 하인은 그제야 자기를 엎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놀란 하인은 내리려고 버둥거렸지만 김 대감은 “가만히 있으라”며 하인을 업고 성내천을 건넜다. 내를 건넌 뒤, 하인은 벌벌 떨며 넙죽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김 대감은 “길 바쁘니 어서 가라”며 그냥 보냈다고 한다.



 예부터 오금동에서는 먹을거리 걱정을 말라고 했다. 유유히 흐르는 성내천과 태평성대에 봉황이 앉았다는 오동나무가 서있는 이곳에선 누구나 김종서 대감같이 너그럽고 후한 인심을 지니게 되나 보다.



도영림(43) 해설사는 2009년 송파 문화원 박물관대학 수료 후 심화과정을 거쳐 송파문화해설사로 활동중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전시 해설사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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