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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재정적자, 사회분열, 권력적자

중앙일보 2012.10.08 00:00 종합 39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불황은 사회분열과 정치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나라살림도 예외일 수 없으며 특히 경제적 약자들의 고통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러한 국가적 시련의 고비에서 맞게 된 대통령선거의 열기 때문인지 무책임한 복지공약이 난발될 뿐 설득력 있는 위기극복의 대책은 실종되어버린 걱정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고 지난 반세기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정부의 경제정책 수립과 운용의 책임을 맡았던 경제관료들과 유수한 학자들이 경고와 더불어 일련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추석 직전 남덕우 전 총리가 이끄는 한국선진화포럼의 토론회와 강경식 전 부총리, 강봉균 전 장관을 중심으로 발족한 건전재정포럼의 심포지엄에서 제시되고 논의된 위기상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많은 국민이,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예의 검토해야 될 시급한 과제다.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이들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재정건전성의 중요함이다. 경제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며 사회복지를 확대하려면 세금을 올리고, 정부 지출을 감축해 우선적으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 국민이 증세에 찬동하겠는가. 그렇다면 손쉬운 복지공약을 위한 재원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국채 발행으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해도 국채 발행의 악순환이 국가 부도로 이어진 사례가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어려운 때일수록 국가재정의 적자운영은 경계해야만 한다. ‘건전재정이 마지막 버팀목’이란 강경식 전 부총리의 단언을 결코 가볍게 흘려들어서는 안 되겠다. 건전재정과 경제민주화는 상치되는 원칙이 아니며, 경제민주화는 헌법적 지침이지 경제위기의 해법이 될 수 없다는 남덕우 전 총리의 지적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라는 구호가 여야를 초월한 국민적 요구로 널리 인식되는 것은 정치권력의 독점과 경제력의 집중으로 말미암은 불균형이 불공정사회를 만들어버렸다는 결론이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봉균 전 장관의 지적대로 젊은이들이 미래 희망을 잃는 것은 분배의 격차보다도 경쟁 규칙의 불공정성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재벌 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중심 목표로 부상한 것은 대기업이 불공정 경쟁의 표적으로 인식되는 결과다. 대선주자들이 정당·국회·청와대의 개혁보다는 재벌 개혁을 우선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설명되고 있지 않다. 만약 이것이 복지포퓰리즘의 결과라면 무책임한 정치공약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경제체제의 공정성 확립이라 하겠다.

 오늘의 경제위기가 세계경제의 불황 못지않게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취약성 때문이라면 과감한 구조조정은 위기 극복의 필수요건이며 두 포럼에서도 설득력 있는 조정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언제 어떻게 추진할지와 여러 개혁 및 정책목표 사이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 선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경제위기와 사회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권력적자의 늪에 빠져들지 않는 정치 건전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업과 가계에서의 수지타산처럼 국가통치에서도 권력의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권력의 적자운영은 정치 불안정을 초래하게 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정치에서는 국민의 지지가 곧 권력수입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른바 포퓰리즘의 유혹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1975년 스페인을 기점으로 포르투갈·그리스로 확산된 ‘민주화 제3의 물결’은 87년 한국까지 밀려왔었는데 이들 민주화의 모범국들이 오늘날 경제·사회·정치의 위기를 맞아 고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을 포함해 민주화된 나라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경제성장과 사회복지를 위해 어떻게 하면 높은 수준의 재정지출과 권력지출을 확보하면서도 재정적자와 권력적자의 늪을 피해 갈 수 있느냐다. 특히 세계경제와 국내 경제가 함께 불황에 처한 이때에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한 국민의 절제와 희생을 어떻게 설득해 권력수입의 감소를 막느냐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다. 매사를 남의 탓으로 미루어 국민을 혼동시키는 잔꾀나 내셔널리즘에 호소하는 흥분제 처방은 결코 적자운영의 장기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공정성과 책임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설득 및 타협의 정치관행 없이는 건전재정이나 사회통합이 밑받침하는 민주국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대선이란 선택의 시간을 앞두고 적자사회, 적자국가가 되지 않도록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될 때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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