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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하우스 곳곳에 개혁 흔적이…

중앙일보 2012.10.05 03:10 Week& 2면 지면보기
루터가 죽기 직전 섰던 설교단이 그대로 남아있는 아이슬레벤의 성 앤드루 교회. 옛 동독 시절 오랜 종교 박해의 영향때문인지 신도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루터의 자취를 좇아온 방문객이 이따금 교회의 정적을 깼다.
독일의 심장부에 위치한 작센안할트주는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1483~1546)의 성지다. 그중에서도 ‘루터의 도시(Lutherstadt)’란 명패를 자랑스레 내건 곳이 있다. 루터가 태어나고 숨을 거둔 도시 아이슬레벤과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교회의 배를 불리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것을 비판하며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비텐베르크다. 두 곳 모두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종교를 탄압했던 옛 동독이 1983년 루터 탄생 5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한 장소도 이 두 도시였다. 그러니까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축전의 주 무대도 바로 여기가 될 거란 이야기다.


독일 ‘루터 도시’ 순례

지난달 22일 엘베강을 푸른 리본처럼 두른 작센안할트주로 향했다. 숲이 드문드문 이어진 아이슬레벤~비텐베르크의 루터 순례길은 소박한 정취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지르밟고 싶었다. 먼 길을 오직 두 발에 의지했던, 그 옛날 중세의 순례자처럼….



글·사진=나원정 기자





개신교의 베들레헴, 아이슬레벤



루터의 도시 곳곳에서 만난 루터의 문장(紋章), ‘루터의 장미’.
529년 전 종교개혁의 주인공을 낳은 도시는 토요일이어서인지 적막했다. “젊은 사람이 적어 조용해요. 일요일에는 여는 가게도 없어요. 오후 3시의 전통적인 커피 타임을 위한 케이크집만 문을 열죠.” 토박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루터는 자칭 “보헤미안처럼 먹는” 대식가였다. 아이슬레벤의 ‘루터 레스토랑(Gastat tte Lutherschenke)’에서는 그가 먹던 중세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사진은 쌀밥을 곁들인 닭고기 요리.
하르츠산맥(해발 1142m)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아이슬레벤은 1000년 넘은 역사를 간직한 인구 2만5000여 명의 작은 도시다. 구리 광산이 크게 부흥한 1483년 11월 10일 광산업자 한스 루더의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튿날인 11일, 아기는 이웃한 ‘성 피터와 바오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성 마틴 축일이어서 아기는 ‘마틴’이란 이름을 얻었다. 마틴 루더. 훗날 라틴어식 성(姓)인 ‘루터’로 개명하기까지 그는 그렇게 불렸다.



6개월 뒤 루더 일가가 만스펠트로 이주하기까지 살던 곳이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다. 1693년 이곳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자선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구경꾼이 외려 더 몰렸다. 천금을 주고라도 루터가 쓰던 침대며 물컵 따위를 보려는 이가 늘어섰다. 1817년 프러시아 왕은 문맹 탈피를 부르짖은 루터의 유지를 받잡아 자선학교를 증설했다. 그게 생가 맞은편 건물이다. 2007년 신축된 건물까지 모두 3개 동이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좁은 갱도에서 구리를 캤던 15세기 광산 모형과 루터가 선사시대 화석에 대해 보인 흥미로운 소감문 등이 전시돼 있었다. 온 가족이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다던 루터 가족의 거실을 재연한 방 등을 다 보는 데 4유로(약 6000원)의 관람료를 냈다.



비텐베르크의 성곽교회 대문에는 1517년 루터가 못 박은 95개조 반박문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성 피터와 바오로 교회는 최근 1~2년 사이 완전히 새단장했다. 교회의 500여 년 역사를 간직한 건 석면에 새긴 십자가 부조뿐이었다. 못 박힌 예수는 닳아 없어지고 십자가 발치의 잎사귀만 선연했다. 죽음의 십자가에 돋은 새싹. 성 피터와 바오로에게 축복받은 아기 루터의 운명을 예언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1505년 슈토테른하임에서 벼락을 맞아 죽을 뻔한 스물두 살의 법학도는 남은 생을 신께 바치겠노라고 선언한다.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종교개혁가의 굴곡진 삶을 살았다. 1546년 환갑을 넘겨 고향을 찾은 루터는 쓰러지기 직전 ‘성 앤드루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 주제는 마태복음 11장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루터가 숨을 거둔 집은 사라지고 대신 1726년부터 임종을 맞이한 집으로 오인된 곳이 박물관으로 보존돼 있었다. 내년까지 공사로 닫힌 그 집 앞에서 마지막 순간 루터가 손에 쥐고 있었다는 쪽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거지다. 그건 사실이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다 짊어졌던 그는 그처럼 홀가분하게 떠났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비텐베르크의 성곽교회. 500여 년 전 유럽 전역을 발칵 뒤집은 종교개혁의 진원지다.


종교개혁의 요람, 비텐베르크



차로 2시간여 동쪽으로 내달렸다. 루터의 주검이 비텐베르크 ‘성곽교회(Castle church)’의 무덤으로 향했던 그 길이다. 이윽고 루터가 반생을 보내며 부패한 로마 교황청에 직격탄을 날린 무대, 비텐베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텐베르크는 15세기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도읍으로 삼으면서 크게 번성했다. 선제후는 은광에서 쌓은 부를 쏟아 ‘검은 수도원’과 ‘비텐베르크 대학’ 등을 지었다. 1508년 비텐베르크로 이주한 루터는 검은 수도원에서 학생들과 기거하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종교개혁의 본산이었던 비텐베르크 대학은 16세기 말 유럽 전역의 학생을 끌어들이며 당대 최고 대학으로 손꼽혔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구교도인 덴마크 왕자 햄릿이 호기롭게 유학한 곳도 비텐베르크 대학이었다.



루터가 35년간 거주한 루터하우스의 안뜰을, 중세복장의 관광가이드(왼쪽)가 가로지르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의 동상.


교회가 죄를 사하는 ‘면죄부’와 금식일에 우유와 버터를 허하는 ‘식사허가증’까지 팔던 시대였다. 매해 엄청난 돈이 로마 교황청으로 흘러들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성곽교회 대문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학자들이 곧잘 대자보를 붙이던 자리였다. 30년의 기나긴 신·구교도 간 전쟁은 그렇게 촉발됐다.



1522년 루터는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서 초판본을 세상에 내놓아 파란을 일으켰다. 그 책을 인쇄했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루터 시대의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생가로 마르크트 광장과 마주 보고 있다. 이 신약성서는 2년 뒤 루터가 완역한 독일어 성경과 더불어 세기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루터하우스에 전시된 루터가족의 식당 미니어처. 당시엔 학생, 대학 직원 등 군식구가 많아 매번 이런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루터하우스 발굴 당시 2000개 넘는 돼지뼈가 발견됐다.


500여 년 전 루터가 학생들과 토론하던 책상.


광장 한복판의 루터 동상을 굽어보는 2개의 종탑은 ‘시교회(Town church)’로 불리는 ‘성 매리 교회’의 것이었다. 전직 사제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여기서 전직 수녀 카타리나 본 보라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루터는 사제의 결혼이 외려 타락을 막는 건강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수도원을 뛰쳐나온 16세 연하의 아내와 슬하에 6남매를 뒀다. 시대가 반대한 파격적인 결합은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에는 도움이 됐다. 그 단서는 루터하우스에 있다.



루터의 시신은 성곽교회 설교단 아래 작은 석조 무덤에 안치됐다. 왼쪽은 지난달 22일 마을 음악회를 위해 단상에 선 비텐베르크의 아이들.
루터가 35년간 머무른 탓에 루터하우스로 불리는 검은 수도원에는 군식구가 많았다. 가족·친척도 모자라 직원·학생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저술과 강연을 무료로 베풀었던 루터 대신 살림살이를 도맡은 건 아내였다. 귀족 출신인 그녀는 텃밭을 가꾸고 마굿간과 맥주 양조장을 꾸리며 루터를 내조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루터하우스 곳곳에 역력하다. 언젠가 루터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집 살림은 기적에 가깝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다.”



루터하우스는 1883년부터 관람객에게 개방됐다. 당시 루터와 학생들이 토론을 벌인 책상, 종교개혁 확산에 큰 역할을 한 최초의 개신교 찬송가집(集), 루터의 한 제자가 스승을 그린 낙서화 등 1000여 점의 알찬 원본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2017년, 루터하우스는 미공개 유물을 대거 공개한다.








매년 11월 10일 ‘성 마틴 축제’



‘마틴 루터’란 이름이 적힌 16세기 개신교 찬송가집. 음악에 재능이 있던 루터는 찬송가를 직접 작사하고 종종 작곡도 했다.
종교개혁을 향한 마틴 루터의 발자취는 독일의 작센안할트주와 튀링겐주에 밀집돼 있다. 작센안할트주에서는 대표적인 루터 도시 아이슬레벤과 비텐베르크뿐 아니라 마그데부르크도 유명하다. 신·구교 간의 30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가 1631년 대거 유입된 프랑스 신교도들에 의해 재건돼 현재에 이르렀다. 할레에는 루터의 데스마스크가 보존돼 있다.



 튀링겐주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아이젠나흐다. 유년시절 루터는 성 조지 교회의 성가대로 활동했다. 훗날 그가 음악적 재능을 발휘한 개신교 찬송가는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바흐 역시 성 조지 교회의 성가대 출신이다. 또 루터가 독일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한 곳도 아이젠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이다. 그가 11주간 작업한 책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르트부르크성에서는 내년 3월 3일까지 루터 생애에 관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매년 6월, 비텐베르크에선 루터의 결혼 기념 축제가 열린다. [사진 독일관광청]
 에르푸르트는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은 정신적 고향이다. 그를 기려 매년 11월 10일 루터의 탄생일에 성 마틴 축제가 열린다. 뭘하우젠은 루터의 신약성서 번역에 영감을 받은 급진주의자 토마스 뮐러가 독일 농민혁명을 주도했다 1525년 교수형에 처해진 곳이다. 튀링겐주의 바이마르·슈만칼텐과 작센안할트주의 데사우는 루터가 자주 머물며 교리를 설파한 곳이다.



 한편 올해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와 관련된 다양한 음악회가 열린다. 오는 26~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에 맞춰 유명 음악가들의 르네상스 음악 연주회가, 특히 27일에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성곽교회에서 트롬본 합주가 마련돼 있다. 정기 연주회도 있다. 이달 말까지 성곽교회에서는 매주 화요일, 시교회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오르간 연주회가 진행된다. 비텐베르크의 루터 관련 축제의 백미는 ‘루터의 결혼’이다. 매년 6월 둘째 주 2000명의 주민이 전통의상을 입고 웨딩 퍼레이드에 참석한다. 실제 백년가약을 맺는 커플도 있다. 내년 행사는 6월 7~9일 예정. 나원정 기자





이용 정보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www.eisleben-tourist.de)·비텐베르크(www.lutherstadt-wittenberg.de)와 가장 가까운 공항은 베를린공항이다. 인천에서 루프트한자(www.lufthansa.com) 등 직항편으로 뮌헨이나 프랑크푸르트로 간 후 베를린으로 환승하면 된다. 루터의 고장(www.visit-luther.de)이나 작센안할트주(www.saxony-anhalt-tourism.eu), 각 도시 관광청을 통해 다양한 투어와 오디오 가이드, 숙박 예약 등이 가능하다. 현지 관광안내소에 문의해도 된다. 독일의 요즘 날씨는 낮 최고기온이 20도 이하로 쌀쌀하다. 덧입을 외투와 우산 등이 필수다. 주한 독일관광청 www.germany.travel, 02-773-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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