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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별’들이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

중앙일보 2012.09.25 00:30 종합 36면 지면보기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하략).



 ‘늙은 군인의 노래’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 포크계의 대부 격인 김민기가 동부전선, 그 옛날에는 군 생활이 워낙 험난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알려진 ‘인제·원통’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작곡한 노래다. 정년퇴임을 앞둔 선임하사가 막걸리 두 말을 내고 의뢰해 만들어진 곡. 30여 년 군 생활을 마감하는 육군 상사가 토로한 국방색 제복의 서러움에서 모티브를 얻어 노랫말과 곡을 붙였다고 한다.



 병영에서 암암리에 애창되던 노래는 얼마 뒤 금지곡으로 지정된다. 세월이 흘러 지금에야 정치나 이념성을 이유로 부르지 못하는 노래는 없어졌지만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노래는 오히려 일반인에게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어둡고 어려웠던 시대, 강남 룸살롱 숙녀들까지 애창해 졸부들의 호화 주석에 무언의 반항을 했으며, 민주화에 목마른 동남아 국가들에까지 수출되기도 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금지된 이유는 황당하다. 당시 국방장관은 전군에 이 노래를 부르지 말 것을 지시한 데 이어 문광부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일반인에게까지 금지곡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군 사기 저하와 군 이미지 실추가 그 이유였다. 하지만 노래는 가사의 높은 서정성,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는 보기 드문 애잔한 멜로디로 인해 대학가, 재야 운동가, 노동계의 큰 호응을 얻으며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 왔다. 기이하게도 금지 조치가 ‘빡셀수록’ 노래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갔다. 비록 방송에서 퇴출되고 음반 발매는 금지되었지만, 이 노래는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좋은 시절에는 잊혀지다가 삶이 고통스럽고 시대가 암울하면 먹먹한 가슴으로 부르는 기구한 운명의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였다. 지금의 걸그룹이 부르는 댄스 음악과는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특히 이 노래는 노랫말에 등장하는 군인 대신 교사, 농민,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불리면서 민초들의 삶의 현장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아 왔다. 최근 ‘불후의 명곡’에서 가수 홍경민이 대형 중창단과 함께 웅장하고 진정성 있는 노래로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날 이후 이 구닥다리 노래는 유튜브에 오르는 등 신세대들에게도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최근 몇 년간 군 장교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서너 차례 가졌다. 예상대로 민간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직하고 순수한 구석이 많아 보였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심하다 싶을 정도의 반공의식과 명예, 사명감 등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젊은 날, 영화 ‘사관과 신사’를 보고 장교의 탄생 과정에 대해 감동을 느낀 적이 있었고 ‘어 퓨 굿 맨’ 등 병영을 그린 영화를 보면서 군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나로서는 나름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군인들과 어울린 저녁 자리를 통해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늦은 밤, 마지막 잔을 들이켜며 이들이 비감 어린 표정으로 취해 부르는 공통된 노래가 딱 하나 있었다. 정말 아이로니컬하게도 한때 병영에서 엄격히 금지되었던 바로 ‘늙은 군인의 노래’다.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죽어서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라는 대목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한껏 높아져 밤하늘로 퍼져나간다. 특히 최근 어느 술자리에서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한 오십대 노장군들이 서로서로의 어깨를 얼싸안고 부르는 이 노래를 듣는 희귀한 시간을 가졌다. 취한 탓일까?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이라는 대목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쓸쓸하게 젖어 있었다. 돌아오는 깊은 밤, 나는 비로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군인들의 삶과 그들만의 슬픔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소중한 그 많은 것에 대해 혹시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너무 무시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며칠 후면 국군의 날이다.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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