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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캉 춤 주제음악 작곡한 ‘샹젤리제의 모차르트’

중앙선데이 2012.09.23 03:47 289호 28면 지면보기
17세기 중엽 이탈리아 나폴리를 중심으로 희가극(喜歌劇)이 출현했다. ‘오페라 부파’다. 근엄한 오페라에서 희극적인 요소를 떼어내 독립시킨 것이다. 바로크시대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1733년 ‘마나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란 오페라 부파를 발표했다. 오페라 부파는 18세기부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오페레타라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으로 발전했다. 오페레타도 오페라 부파와 같이 희극적인 내용이 중심이지만 대사와 무용이 많이 가미된 게 특징이다. 이 오페레타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은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사진)란 유대인이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오페레타의 선구자 자크 오펜바흐

‘호프만의 뱃노래’로 대중에게 익숙
오펜바흐는 1819년 당시 프러시아 지역인 쾰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야콥 레비 에베르스트다. 시나고그 성가대 지휘자인 아버지 이자크는 가계가 처음 정착한 곳인 오펜바흐 암 마인이란 지명을 따서 오펜바흐로 개명했다.오펜바흐는 어린 시절 첼로를 배웠다. 당시 독일 내 반유대주의 분위기를 감지한 아버지는 1833년 아들을 파리로 이주시켜 음악 공부를 시켰다. 파리 콩세르바투아르 음악원 첼로반을 다녔다. 틈틈이 작곡 공부도 했다. 이름도 프랑스식 자크로 바꾸었다. 음악원을 마치고 오페라 코미크(희가극 극장)에서 첼로 주자로 활동했다. 1837년엔 프랑스 고전연극공연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1855년이 되자 그는 파리 중심가 샹젤리제에 자신의 공연장인 부프 파리지앵을 설립했다. 이후 40여 년간 모두 100여 편의 오페레타·기악곡·교향곡을 작곡했다.

1858년 오펜바흐는 그의 평생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우수’(Orphee aux enfers)를 발표하고 그해 초연을 가졌다. 유대인 친구이며 문인인 뤼도비크 알레비가 프랑스어 대본을 만들었다. 총 2막의 이 오페레타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장중하고 근엄한 오페라와는 뚜렷하게 차별되는 밝고 경쾌한 음률은 청중을 매료시켰다. 특히 2막 2장에 등장하는 ‘지옥의 갤롭’(Galop infernal)은 ‘프렌치 캉캉 춤’의 주제 음악이 됐다.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의 대중 공연장 물랭루주는 지금도 매 공연의 피날레를 캉캉 춤에 할애한다. 아르 누보 화파의 거장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파리의 낭만을 상징하는 물랭루주와 캉캉 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파리에서 한동안 활동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는 오펜바흐를 ‘샹젤리제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이후 오펜바흐는 많은 오페레타를 발표했다. 그중 ‘아름다운 엘렌’ ‘제롤스탱 대공비’ ‘파리의 삶’ ‘푸른 수염’ ‘페리숄’ 등이 많이 알려졌다. 첼로·피아노 등 기악곡, 그리고 몇 편의 교향곡도 작곡했지만 오페레타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프랑스에서의 그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음악적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독일계 유대인이란 출신 성분이 장애였다. 1870년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오펜바흐는 양측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프러시아는 ‘배신자’, 프랑스는 ‘프러시아 첩자’로 그를 몰아세웠다. 그래서 그는 파리를 떠나 약 1년간 보르도·밀라노·빈 등 유럽 도시를 유랑하면서 근근이 활동을 이어갔다. 다시 파리에 돌아와 보니 그가 운영하던 극장은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됐다. 부채 청산을 위해 미국에서 잠시 연주 활동을 하기도 했다.
1878년 오펜바흐는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호프만의 이야기’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완성을 목전에 두고 지병인 통풍이 악화돼 188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친우인 에른스트 기도가 이 오페라를 완성시켰다. 다음해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이 열렸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Belle nuit, O nuit d’amour, ‘호프만의 뱃노래’)은 지금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1938년 프랑스 유대인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마뉴엘 로젠탈은 오펜바흐의 소품을 모아 ‘파리의 즐거움’(Gaite Parisienne)이란 발레 조곡을 만들어 오펜바흐를 기렸다.

영국·미국의 뮤지컬 출현에 큰 영향
오펜바흐가 활동하던 시대의 유럽은 곧 닥쳐 올 세계대전의 위협을 모른 채 문화·예술의 완숙기인 ‘아름다운 시절’을 즐겼다. 대머리, 턱수염, 코에 걸리는 동그란 안경의 오펜바흐는 자신의 희극적인 풍모와 같이 낭만과 자유주의 시민의식, 그리고 풍자정신을 대변했다. 풍부하고 청아한 관현악은 무겁고 지루한 오페라로부터 대중을 쾌활한 음악세계로 인도했다. “경박하고 호사스러운 음악”이라는 일부 오페라 순혈 애호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는 모두와 친밀감을 더 할 수 있는 대중예술로 자리매김했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가 성공을 거두자 유럽의 다른 작곡가들도 이 조류에 합류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프란츠 주페, 칼 밀뢰커 그리고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 등은 ‘박쥐’ ‘경기병’ ‘여인의 섬’ ‘즐거운 미망인’ 등 다양한 소재의 오페레타를 내놓아 ‘빈 오페레타 시대’를 열었다.
오페레타가 끼친 영향 중 가장 주목할 것은 뮤지컬의 출현이다. 오페라의 불모지였던 영국과 미국은 19세기 말 유럽의 오페레타를 도입해 스케일이 큰 음악극인 뮤지컬을 만들었다. 당대에는 “오페라를 오염시키는 천박한 음악”이란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오페레타를 품격 있는 대중오락으로 확산시킨 오펜바흐의 창의적 노력이 보다 더 대중친화적인 뮤지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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