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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종전쟁론’ 앞세워 대륙 침략한 이시하라 간지

중앙선데이 2012.09.23 03:36 289호 26면 지면보기
유조호 사고 직후 현장. 관동군은 자신들이 철로를 끊어놓고 장학량 군대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주를 침략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 9월 18일 밤 10시20분 무렵. 심양(瀋陽·옛 봉천) 북쪽 7.5㎞ 유조호(柳條湖) 부근 남만(南滿) 철도의 한 선로가 폭파되었다. 관동군사령부 조례 제3조에 따르면 남만철도가 끊기면 관동군이 출동할 수 있었다. 관동군은 즉각 ‘장학량 군대의 소행’이라면서 북대영(北大營)을 공격했다. 9·18사변, 즉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시작이었다. 선로 폭파 역시 장작림 폭살처럼 관동군의 자작극이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③ 만주사변

만주사변의 특징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나 참모장 미야케 미쓰노리(三宅光治) 같은 관동군 수뇌부가 아니라 관동군 참모였던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征四郞: 1885~1948, 훗날 육군대장, 도쿄 전범재판으로 사형) 대령과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령 같은 영관급 장교들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타가키와 이시하라는 모두 센다이(仙台) 육군지방유년학교에서 어린 시절부터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전쟁기계로 길러졌다. 이 중 ‘육군에는 이시하라가 있다’고 선전될 정도로 전략의 천재라고 불렸던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 점령 계획을 입안했다.

이시하라는 육군유년학교 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육사 시절에는 350명 중에 3등이었지만 구대장(區隊長)에게 반항해 6등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육사 시절에는 전사(戰史)는 물론 철학과 사회과학에 몰두하고 휴일이면 사회 명사들을 방문했는데, 나중에는 법화종의 한 분파인 일련종(日蓮宗:니치렌종) 계열 국주회(國柱會)의 종말론에 심취해 ‘세계 최종전쟁론’을 고안했다. 이시하라 간지가 1931년 5월 작성한 만몽문제에 관한 사견(滿蒙問題私見)은 관동군 참모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 일련종의 종말론을 응용한 ‘세계 최종전쟁론’이 담겨 있었다.

1 유조호 사건 다음 날 일본은 심양(봉천)을 공격해 점령했다. 2 이타가키 세이지로. 만주사변을 총괄 기획한 관동군 참모였다. 3 이시하라 간지. 불교 일련종의 종말사상을 받아들여 세계 최종전쟁론을 만들었다
13세기의 승려 일련(日蓮:1222~1282:니치렌)은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란 불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말법 시대에 ‘전대미문의 대투쟁이 일어나 세계가 괴멸된 후 묘법의 조화를 이루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일련종은 19세기 다나카 지카구(田中知學:1861~1939)가 일본국체학(日本國體學)을 주창하면서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내셔널리즘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법화종의 한 종파인 일련종이 이시하라 같은 전쟁기계들이 열광할 수 있는 이론으로 변질되었다.
다나카 지카구의 강연을 듣고 국주회에 입회한 이시하라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가 소비에트연방, 미주, 유럽, 동아시아라는 4개 국가연합으로 나뉘었다고 분석했다. 4개 연합 사이에 일종의 준결승이 벌어져 소비에트와 유럽이 탈락하고 일본과 미국이 결승전을 벌인다는 것이 최종전쟁론이었다. 최종전의 결과 일본 아니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이시하라는 ‘세계전쟁의 준비가 덜 되었다’면서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을 반대하고, 1944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의 암살에도 관여해 전범 재판에서 제외되지만 만주사변 이후 군국주의자들의 행보는 그의 최종전쟁론을 실천한 셈이었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모든 전략과 국력은 최종전쟁에 맞춰져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만주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는 “재만(在滿) 3천만 민중(民衆)의 공동의 적인 군벌과 관료를 타도하는 것이 우리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궤변으로 만주침략을 정당화했지만 만주는 최종전쟁을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침략자를 방어자로 둔갑시키는 정신병적인 집단 자의식이 있다. 이시하라도 “일본은 북쪽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고 남쪽 미·영의 해군력에 대항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러시아와 미·영의 침략 위협을 받는 국가인 것처럼 가정했다.

이시하라의 최종전쟁론에 육군유년학교 출신 전쟁기계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대던 차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든 대공황이 가세했으니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일본도 비켜갈 수 없었다.
대공황 직전인 1929년 7월 들어선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行)의 입헌민정당 내각은 침체된 경제 소생을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입안했다. 하나는 국내 물가 인하와 수출 장려를 위해 통화량을 줄이고 정부지출을 삭감하는 긴축재정이고, 또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포기했던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는 고정환율제였다. 고정환율제는 국제무역과 투자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29년 하반기 도매물가가 6% 하락하는 등 긴축재정이 성공을 거두자 1930년 1월에는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해 물가하락의 이점이 사라졌다. 금본위제에 의한 고정환율제는 엔화가치의 추가하락은 막았지만 엔화가치가 더 떨어졌다면 더 늘 수 있었을 수출 증가도 막았다. 일본의 금융자본, 즉 재벌은행들은 정부가 조만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엔화를 평가절하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대거 사들였는데 실제로 정부는 1931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절반으로 급락하자 재벌은행은 이미 매입한 달러로 엔화를 다시 사들여 엄청난 이득을 거두었다.

1930년대 초 실업자는 300만 명에 이르러 노동쟁의가 빈발하고 농촌 생활은 극도의 곤궁에 빠진 상황에서 금융자본가들은 거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청년장교들이 정당정치인과 재벌 등을 타도하고 일왕과 민중 중심의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한 권력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1927년 9월 청년장교들과 비밀결사체인 천검당(天劍黨)을 결성하려던 오오기시(大岸賴好)가 ‘황군(皇軍)의 70%가 농민의 자제이자 일본의 토혼(土魂)’이라면서 “이런 농민 출신 병사가 귀향해서 농촌의 참상과 피폐를 보고 무엇을 느끼겠는가. 오늘 같은 현상을 그대로 방치해 둔 채 과연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강한 군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그가 재벌과 그에 기생하는 정당 정치인들을 성토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쿠데타 세력들은 국내 쿠데타를 먼저 일으키고 만주를 침략하자는 내선외후파(內先外後派)와 만주를 먼저 침략한 후 국내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외선내후파(外先內後派)로 나뉘었다. 하지만 모두 만주 장악의 필요성에 동감한 것은 비단 이시하라의 세계 최종전쟁론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출하는 출구로도 만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타가키와 이시하라가 자작극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려 한 것은 비단 영관급 장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타가키는 1931년 7월 신임 관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혼조 시게로에게 “만약 충돌사건이 일어난다면 육군 중앙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어서 “육군 중앙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독단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는 답을 받았다. 8월 초 이타가키는 도쿄로 출장 가 니노미야(二宮治重) 참모차장, 니이소(小磯國昭) 군무국장, 다테가와(建川美次) 참모본부 1부장 등을 만나 ‘만주의 군사행동은 관동군에게 일임한다’는 내락도 받아냈다. 육군 수뇌부가 청년 장교들을 부추기는 셈이었다.

이때 관동군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봉천(奉天) 총영사가 외무성에 이 사실을 보고하자 시데하라(幣原喜重郞) 외상은 미나미 지로(南次郞:제3대 조선총독 역임) 육군대신에게 관동군을 자중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미나미는 다테가와 작전부장을 만주로 보내 자중하게 했다.
그러나 청년장교들의 침략을 지지하던 다테가와는 9월 15일 일부러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느릿느릿 만주로 향했다. 그 사이 사쿠라회를 만든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는 이타가키에게 “계획이 알려졌으니 즉시 실행하라”, “다테가와가 봉천(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결행하라”, “국내는 걱정 말고 즉각 결행하라”는 비밀 전보를 세 차례나 보냈다.

다테가와가 심양(봉천)역에 도착한 시간은 도쿄 출발 사흘 후인 9월 18일 오후 7시. 이타가키는 다테가와를 곧장 기쿠분이라는 요정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먹였다. 그 사이 심양 호석대(虎石台)에 주둔하는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의 고모토(河本末守) 중위가 하사관 고스기(小杉喜一)와 선로에 화약을 장착했다. 봉천 특무기관 보좌관 하나야 다다시(花谷正) 소좌와 장학량의 군사고문 보좌관 이마다 신타로(今田新太<90CE>) 대위도 깊숙이 개입했다.

드디어 오후 10시20분, 철로가 폭파되자 다테가와와 요정에서 술을 마시던 이타가키는 뛰어나가 “장학량 군대가 공격했다”면서 북대영을 공격하게 하고 다음 날 심양까지 점령하고 봉천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1883~1948, 훗날 육군대신, 도쿄 전범재판 때 사형)를 임시 시장으로 임명했다. 첩보공작이 전문이었던 도이하라는 만주국 건국과 화북(華北)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는 화북 분리공작에 나선다. 일본 승리의 서장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파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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