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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수입 막히면 청양 고추도 못 먹을 판

중앙선데이 2012.09.23 01:56 289호 12면 지면보기
‘농부아사(農夫餓死) 침궐종자(枕厥種子)’라는 옛말이 있다. 농부는 기근으로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이듬해 뿌릴 씨앗을 남겨 머리에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농민에게 씨앗은 목숨과 바꿀 정도의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농민들에겐 베고 죽고 싶어도 그럴 만한 씨앗이 부족하다. 내 땅에 뿌릴 주요 종자의 상당 부분을 다른 나라에서 사 오는 판이다. 선진국보다 종자 개발 노력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데다 근래 우리 종자의 소유권이 대거 외국에 넘어간 탓이다.
 

농업도 이젠 첨단산업 ③종자 주권 키워야

올해부터 10년간 로열티 8000억 내야
톡 쏘는 매운맛이 그만인 ‘청양 고추’, 아삭아삭하기로 유명한 ‘금싸라기 참외’, 당도 높은 ‘삼복 꿀수박’. 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얼핏 신토불이(身土不二) 토종 같지만 실은 외국에서 씨앗을 들여다 재배한 농산물이다. ‘외래 품종’이 된 사연과 현주소는 조금씩 다르다. 청양 고추는 우리가 개발한 종자인데 이를 보유한 회사가 외국에 팔리면서 역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삼복 꿀수박 종자는 최근 우리 업체가 외국회사에서 되사들여 우리가 다시 주인이 됐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외국 업체가 소유한 종자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50%를 웃돈다. 전남대 김성길 교수는 “우리 밥상에 오르는 농산물의 절반 이상이 외국 업체의 종자를 쓴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산업 입국’의 기치 아래 5000만 명 이상 인구 국가 중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한 ’20-50 클럽’에 올해 세계 일곱 번째로 가입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농업의 종자 주권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씨앗을 한 번 수입했다고 계속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해마다 사 와야 한다. 외국 기업들이 유전자 변형을 통해 씨앗이 한 번밖에 발아할 수 없도록 막아놓아서다. 농민을 상대로 특허소송을 벌여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가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지난 10년간 해외 씨앗 특허 공세로 피폐해진 농민 15만 명이 목숨을 끊었다는 우울한 집계도 있다. 올해부터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우리나라는 종자 개발권자를 보호하는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이란 국제기구에 2002년 가입했는데 10년의 로열티 예외 품목 유예기간이 끝났다.

올해부터 모든 외국 씨앗에 대해 로열티를 물어야 한다. 농림부에 따르면 그 금액이 향후 10년간 8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종자는 농림수산업의 기초 자재에 해당한다. 한국농수산대학의 오대근 교수는 “종자 기반이 흔들리면 농림수산업의 성장동력이 약해진다”고 말했다. 뛰어난 재배기술을 갖춰도 내 종자가 아니면 한계가 있다. 김성길 교수는 “지구온난화 등 기후 변화로 인해 앞으로 종자 분야의 신축적 대응이 점점 중요해질 것이다. 대응력이 떨어지면 식량주권, 나아가 국가안보마저 불안해진다”고 경고했다.

세계 종자 시장 규모는 2010년 현재 약 700억 달러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다국적 기업들은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덩치를 불리고 있다. 미국 몬산토 등 10대 종자업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한다. 농림부 관계자는 “일부 채소류를 제외하면 국내 종자 산업은 걸음마 단계”라고 털어놨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국내 종자 산업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급격히 위축됐다. 다국적기업들이 국내 유수 종자업체 ‘사냥’에 나섰다. 청양 고추 씨앗을 개발한 흥농종묘가 우여곡절 끝에 몬산토에 넘어간 것도 그때다. 국내 업계의 유전자원이나 육종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국내 종자업계는 여전히 영세하다. 950개 업체 중 종업원 수 10명 이상인 곳은 23개에 불과하다. 국내 1위 업체 농우바이오의 지난해 매출액은 555억원으로 세계 최대인 몬산토의 약 13조원에 비할 수 없을 정도다. 영세업체들은 종자 개발은 고사하고 유사품종을 복제해 헐값에 유통시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국내 R&D 예산, 몬산토의 30분의 1
규모가 영세하니 연구개발(R&D) 여력도 취약하다. 국내 종자 산업 육성을 위한 R&D 예산은 535억원으로 몬산토 1조5000억원의 30분의 1 수준이다. 동부그룹 계열 농업·식품업체인 동부팜한농이 이달 중순 몬산토코리아의 자산을 인수하면서 무·배추·양파 등 250가지 종자의 사업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고추·토마토·파프리카 등 부가가치가 높은 핵심 종자는 확보하지 못했다.

정부는 ‘2020 미래농업을 선도하는 종자 강국 실현’이라는 구호 아래 10대 추진 전략 과제를 내놓았다. 크게 세 갈래로 ▶민간 연구 인프라를 구축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R&D 투자를 확대하며 ▶종자기업 육성·지원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골든 시드(Golden seed) 프로젝트’다. 금싸라기보다 비싼 종자를 개발해 수출하자는 것이다. 벼·토마토·옥수수 등 20종의 전략품목을 선정했다. 민간업체 연구단지인 ‘시드 밸리(Seed Valley)’ 사업도 추진 중이다. 이런 노력은 일부 빛을 보고 있다. 일본산 품종에 의존해 온 딸기의 경우 국산화율을 지난해 68%까지 끌어올렸다. 해외 종자 의존도가 절대적이던 참다래와 장미도 15%, 22%까지 국산화율을 높였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충남대 임용표 교수는 “금세 해결될 일이 아닌 만큼 종자 자립이 우선이고 그 힘을 바탕으로 수출품목을 발굴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농수산물의 특성상 수출 대상국에 따른 ‘맞춤형’ 품목 개발에도 힘써야 한다. 김성길 교수는 “우리가 중국산 고추에 점수를 덜 주듯이 중국인 입맛도 한국 품종을 부담스러워한다. 나라별 입맛과 식문화를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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