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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 윤호진의 자칭 ‘티켓 혁명’은 꼼수다

중앙일보 2012.09.20 00:56 종합 29면 지면보기
뮤지컬 ‘영웅’ 연출자 윤호진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의 연출가이자 제작자인 윤호진(64·에이콤) 대표는 초조했다. ‘영웅’ 개막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8월, 캐스팅은 여전히 난항이었다. 그간 주인공 안중근 역을 해왔던 정성화는 다른 작품 출연으로 일찌감치 빠진 상태였다. 딱히 대체할 ‘센’ 배우가 없었다. 지금껏 뮤지컬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쳐다 보지 않던 아이돌과 유명 연예인도 잇따라 접촉해봤다. 돌아온 답은 모두 “NO”였다.



 그래도 ‘작품 좋으니 어느 정도 흥행 되겠지’라고 위안 삼았다. 순진한 판단이었다. 막상 티켓 판매를 시작한 뒤 38일간 팔린 건 고작 4000여 장, 전체 좌석(누적기준)의 7%에 그쳤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판매량이 크게 나아지진 않을 것 같았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윤 대표는 결심했다. 2차 티켓 오픈날인 14일, “고가 티켓이 한국 뮤지컬을 멍들게 하고 있다. 과감히 가격에 거품을 빼겠다”라고 발표했다. 그리곤 본래 12만원에 팔던 ‘영웅’을 반 이상 낮춘, 5만원에 내놓았다. 놀라운 가격 파괴다. “내가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 뮤지컬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겠다”라는 비장함도 엿보였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윤 대표는 이번 조치를 ‘티켓 혁명’이라고 선언했지만, “판매가 잘 안되자 가격을 엄청 낮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티켓 혁명’이 아닌 ‘저가 공세’가 더 적확한 표현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거품 낀 가격 낮추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윤 대표는 이번에 창작뮤지컬 지원사업에 선정돼 정부로부터 지원금 5억원을 받았다. 손해를 조금 봐도, 미리 받아 놓은 돈이 있기 때문에 타격이 적다는 얘기다. 뮤지컬 업계가 격분하는 지점이다. “현대자동차가 정부 특혜 받고 소나타를 1000만원에 시장에 내 놓은 꼴”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근 티켓값이 너무 올라 ‘가격 정상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라는 윤대표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뮤지컬 VIP석이 10만원을 돌파한 건 10년이 넘었다. 1990년대 후반까진 5만원 안팎이었다. 2001년 혜성같이 등장한 ‘오페라의 유령’이 이전보다 무려 3배 가량 비싼 VIP석 15만원, R석 10만원에 판매하면서 뮤지컬 티켓값은 급등했다.



 근데 이렇게 비싼 공연이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뮤지컬에 ‘명품’이란 외피가 둘러쳐진 순간이었다. 이후 국내 뮤지컬 티켓 최고가는 일부 예외적 경우(2006년 ‘노트르담 드 파리’ 20만원, ‘라이온킹’ 9만원 등)가 있었지만 10만원∼15만원대의 박스권을 견고히 유지해 왔다. 10여 년간 큰 가격 변동이 없었다면 오히려 거품이 조금씩 제거되는 상황인 셈이다. [그래픽 참조]



 그럼에도 “뮤지컬은 비싸다”란 인식이 국내에 팽배한 건 영화·드라마·음악 등 다른 문화 콘텐트와 비교해 뮤지컬이 상대적으로 비싼 탓이 크다. 작품이 쏟아지면서 뮤지컬에 덧씌워진 ‘명품’ 이미지가 희석화된 측면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분명 국내 뮤지컬계가 위기를 맞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윤대표는 기획 첫 단계부터 ▶스타를 쓰지 않고 ▶스태프 역시 허리띠를 졸라 매 ▶제작비를 아껴 가격도 7만∼8만원대로 책정하는 게 순리였을 게다. 이런 과정 없이 티켓 안 팔리자 턱 하니 반 이상 값을 내리곤, 구국의 결단인 양 포장하는 건 일의 순서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거다. ‘창작뮤지컬계 대부’라는 그간의 칭송과 영 어울리지 않는 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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