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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에선 매달 황제에게 예 갖췄다

중앙일보 2012.09.17 00:40 종합 26면 지면보기
미국 워싱턴DC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방문하고 돌아온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왼쪽)와 김종헌 배재대 교수가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덕수궁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곳이다. 을사늑약 직후 워싱턴 대한제국 공사관의 관리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891년 고종이 자주외교의 꿈을 품고 구입했던 미국 워싱턴DC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지난달 말, 나라와 함께 일본에 빼앗긴 지 102년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 이 건물의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워싱턴 건물 실측하고 온 문화재위원 김종헌·서영희 교수



 건물 매입을 주도한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함께 지난달 29일 워싱턴DC 로건서클의 이 곳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종헌 배재대 교수(건축학)와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교양학과)를 만났다.



 문화재청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이들은 이번 1차 방문에서 건물의 보존상태를 점검하고 내부 실측조사까지 마쳤다. 두 사람은 “102년 만에 뜻 깊은 장소에 들어가는 첫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설렘이 컸다”며 “다양한 연구를 통해 이 건물에 얽힌 당시 역사를 세밀하게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외교관들이 망궐향배(望闕向拜) 하던 공간



1903년 촬영한 워싱턴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사진 위)와 현재 모습. [사진 문화재청]
실측을 담당한 김 교수에 따르면 공사관 내부 구조는 100여 년 전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당시 사진에 찍힌 샹들리에나 의자 등은 사라졌지만, 벽채와 창호, 덧문, 벽난로 등 기본 구조는 거의 그대로였다. 3층 건물 중 1층은 접견실 및 집무실로 쓰이고 있었으며, 2층은 거주자 젠킨스 부부의 침실 겸 휴식공간이었다.



 김 교수가 주목한 공간은 벽이나 칸막이가 없이 탁 트여 있는 3층이다. “보통 서양 건물의 3층은 하인이나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는데, 이 건물 3층은 조선 정부가 집을 사들인 후 파티나 행사를 위한 연회장으로 리노베이션(renovation·개조) 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미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고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근대사 전문가인 서 교수는 최근 서울대 규장각에서 1901년 8월, 당시 워싱턴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정부 앞으로 보낸 문서를 찾아냈다. 공사관 건물 각 방의 용도가 적혀 있는 이 문서를 통해 당시 건물 1층에 ‘정당(正堂)’이라는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당에는 고종황제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이 걸려있었고, 매월 초하루와 15일에 공사관 직원들이 모여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향배 의식을 가졌다. 서 교수는 “당시 지방의 각 관헌 등에는 망배례를 위한 공간이 반드시 마련돼 있었다. 외국이지만,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의식이 행해졌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곳에서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출품을 위한 준비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크다.



 김 교수는 “시카고 박람회에서 펴낸 백서를 검토한 결과, 공사관 건물을 구입했을 당시 주미공사였던 이채연이 전시 준비를 위해 박람회 현장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시카고 박람회는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가한 세계박람회다.



 ◆100년 전 역사가 전하는 교훈



대한제국의 외교무대로 활용됐던 공사관은 1905년 소유권이 일본에게 넘어가고 1910년 일본에 의해 미국인 풀턴에게 팔린 후 한국인들에게 잊혀졌다.



 80년대에 들어서야 일부 연구자와 교민들이 건물의 의의를 확인하고 환수운동을 벌였다.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는 2005년 저서 『살아 숨쉬는 미국역사』에서 이 건물의 사연을 소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서교수는 한국 정부가 이 건물을 되찾은 것은 “끊어졌던 근대사의 고리를 연결하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 동안에는 갑신정변(1884년) 실패 후 갑오개혁(1894년)까지의 10여 년간 당시 왕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식의 평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고종은 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빙하고, 무기를 들여오는 등 미국을 통로로 근대를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했죠. 1891년에 구입한 이 공사관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의 이런 의지는 허망하게 좌절되고 만다. 서 교수는 “고종이 이승만까지 보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지만,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등에서 지속적으로 일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며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적 도전과 좌절의 역사는 현재 한미일 관계에도 함의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 당시 이 건물은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확장통로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며 “이 건물이 100년 전의 역사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큰 그림을 보여주는 장소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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