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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바둑이야기 - ‘반상 위의 야전사령관’ 서봉수 ②

중앙일보 2012.09.17 00:06 경제 10면 지면보기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바둑황제’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자신의 모든 타이틀을 차례로 넘겨준다. 무려 310번을 싸워 119승 191패를 기록한다. 그러나 조훈현이 가장 많이 상대한 기사는 이창호가 아니라 서봉수다. 만년 2인자 서봉수는 조훈현의 절대적인 파워에도 굴하지 않고 무려 366번을 싸워 119번을 이겼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30년 애증을 돌아본다.


366번 싸워 119승 247패 … 서봉수 vs 조훈현 30년 애증

1973년 백남배 본선서 숙적 첫 대결



“조훈현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관철동 바둑동네에 퍼져나갔다. 1963년 일본에 유학을 떠났던 조훈현이 10년 만인 73년 3월 군 입대를 위해 귀국한 것이다. 그 소식은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서늘한 전율을 품은 채 프로기사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시 바둑계는 조훈현보다 10년 연상인 김인 9단의 시대가 막바지를 향할 때였고 윤기현·하찬석·강철민·정창현 등이 그의 적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제 조훈현이란 절대 강자의 말발굽 아래 이슬처럼 사라질 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막 프로가 된 조훈현과 동갑내기 서봉수가 있었다.



 조훈현은 100년에 한 명 나올 천재라는 찬사 속에서 9세에 프로가 됐고 최고의 스승 밑에서 배웠다. 서봉수는 늦게 입문해 18세에 프로가 됐고 저잣거리의 내기바둑과 더불어 성장했다.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일본 바둑’이라는 풍요로운 터전에 비하면 서봉수가 자란 대방동 단칸 셋방과 영등포의 기원은 짜장면 냄새 물씬 풍기는 후진 뒷골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서봉수도 다른 강자들과 마찬가지로 조훈현에게 무수히 패배했다. 그러나 서봉수는 완패하진 않았다. 이 점이 ‘승부사 서봉수’의 다른 점이다. 다른 기사들은 조훈현에게 연패하면 그걸로 포기하고 정신적으로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밀려 멀리 시베리아까지 쫓겨갔다가도 어느새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와 조훈현 왕국의 일각을 매섭게 물어뜯곤 했다. 조훈현이 중원의 ‘황제’라면 그는 배고픈 북방의 몽고족이었다.



1인자 조훈현과 2인자 서봉수의 격돌은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바둑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큰 사진은 서봉수(오른쪽)와 일본에서 귀국해 공군사병이 된 조훈현의 1976년 왕위전 도전기 모습. 오른쪽 작은 사진은 (위쪽부터) 80년대 국수전과 최고위전 도전기, 2001년 삼성화재배 8강전.


 서봉수와 조훈현은 1973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 날, 백남배라는 지금은 사라진 기전의 본선에서 처음 만난다. 이때로부터 2011년 11월의 맥심배까지 38년 동안 두 기사는 무려 366번 대결한다. 바둑사에 이처럼 줄기차게 싸운 숙적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서봉수는 119승 247패를 거둔다. 승률 32.5%. 거리의 무사 서봉수가 ‘바둑황제’와 싸워 세 판 중 한 판을 이겼다. 바로 이 점에서 서봉수의 재능도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봉수의 바둑은 ‘생존’이란 기본적인 틀 안에서 만들어졌기에 화려함이 없고 때로는 누추한 감마저 준다. 바둑의 품격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김인 9단은 바로 그런 이유로 초창기 서봉수 바둑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봉수가 이런 바둑으로 조훈현과 치른 71번의 결승전에서 14번이나 승리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다지만 가끔은 서봉수가 조훈현과 비슷한 수업 과정을 겪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당시엔 아는 게 없었다. 지금 보면 너무 엉터리여서 깜짝 놀라곤 한다.”(서봉수 9단)



 적어도 프로기사가 되려면 일본의 우칭위안 같은 유명기사 기보나 본인방전 전집, 그리고 사활문제집 정도는 공부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서봉수는 이런 책들을 본 적이 없다. 생각하면 온갖 고전들이 가득 꽂혀 있는 조훈현 9단의 서가와 책이라고는 바둑 잡지만 보이는 서봉수의 집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조훈현, 모든 게임 잘 해 … 서봉수, 계산 느린 편



성격도 많이 달랐다. 조훈현은 머리 회전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카드 게임이나 마작 등 모든 게임 속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필자는 조훈현보다 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공부를 했어도 필경 수재였을 것이다. 서봉수는 계산이 너무 느리고 서툴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바둑의 고수가 됐을까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걸음 걸이도 의사 결정도 조훈현은 빠르고 서봉수는 느리다. 조훈현은 약속하면 칼 같고 예스와 노도 분명하다. 남들에게도 그걸 기대한다. 서봉수는 다르다. 타인과의 관계나 세상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깜깜할 때가 많다. 두 사람 사이가 드디어 물과 기름처럼 멀어지게 된 것, 특히 조 9단이 서 9단을 멀리하게 된 것도 이런 성격 차이에 기인하는 바 크다.



 돌아보면 처음 일본에서 돌아온 조훈현은 약간 수줍어하면서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다. 일본보다 물가가 싼 한국에서 그는 동료기사들과 어울려 돈도 잘 썼다. 하지만 70년대 한국은 당시 번영하던 일본에 비해 어려웠고 당연히 각박하고 무서운 구석이 숨어 있었다. 특히 선배 기사에게 사기를 한번 당한 뒤 조훈현도 예민한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서봉수가 조훈현과 100원짜리 내기바둑을 두어 많이 졌으나 그걸로 조훈현을 연구해 도전기에선 이겼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당시 기사실에선 재미 삼아 내기바둑도 뒀다. 서봉수는 조훈현과 한번 겨뤄보고 싶었을 것이고 갓 귀국한 조훈현도 아무 경계심이 없던 때라 흔쾌히 응했을 것이다. 치수는 호선은 아니고 일본기원 5단인 조훈현에게 한국기원 2단인 서봉수가 선(先) 또는 선상선(두 번은 흑, 한번은 백) 정도로 접혔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과는 물론 조훈현의 승리. 당시로서는 분명 수준 차가 있었다.



 73년 7월, 조훈현이 명인전 도전자가 되면서 둘 사이의 첫 도전기가 열렸다. 세인의 관심이 집중됐던 이 대결에서 서봉수는 1, 2국을 잇따라 승리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3국은 졌으나 4국에서 이겨 결국 3대1 승리. 이로써 서봉수와 명인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김인·조훈현·이창호가 ‘국수’로 불리는 것과 달리 서봉수만은 ‘명인’으로 불리게 됐다.



 이해 8월, 조훈현은 공군에 입대한다. 사병이지만 대회엔 참가했고 대국이 끝나 귀대할 때엔 고참병들에게 선물로 줄 담배를 한 보루씩 사가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조훈현은 힘들게 ‘선수’ 생활을 했고 이 바람에 국내에서의 출발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지체됐다. 조훈현의 첫 우승은 74년 부산의 최고위전. 그후 76년 1기 국기전에서 우승하자 바둑계의 면도날 독설가 정창현 7단은 “조훈현이 드디어 한강다리를 건넜다”며 다가올 조훈현의 ‘1인 독재’를 예고했다. 하지만 정창현 역시 서봉수란 존재가 홀로 버티며 15년간 조훈현과 사투를 벌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 바둑, 조-서 라이벌 통해 업그레이드



조훈현은 80년, 82년, 86년에 세 차례 모든 타이틀을 석권하는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만약 서봉수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는 근 15년간 매년 전관왕에 올랐을 것이다. 80년대 도전기는 거의 조훈현 대 서봉수의 대결로 점철돼 있다. 이게 바로 바둑사에서 유명한 ‘조(曺)-서(徐) 시대’다. 팬들은 처음엔 환호했으나 나중엔 “똑 같은 연속극”이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팬들은 장수영·서능욱·강훈·김수장·백성호 등 ‘신흥 5강’을 ‘도전 5강’이라 부르며 조-서 대결 구도를 깨고 우승컵을 거머쥐라고 응원했다. 하나 이들은 우선 서봉수에 가로막혔고 천신만고 서봉수를 넘어 조훈현까지 가도 승리한 적은 없다(서능욱은 무려 13번 준우승했다. 이들 중 강훈만이 1승을 거뒀는데 결승 상대가 조훈현이나 서봉수가 아니었다).



 당시 도전기는 유서 깊은 한옥인 운당여관에서 주로 두어졌는데 어느 날 기왕전 도전기를 보러 간 필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시 여관에 가득 차던 프로기사들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전 5강 중 한 기사는 “맨날 둘이만 싸우고 대국 후엔 복기도 없고 소주 한 잔도 없는데 뭐 하러 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승부세계에서 강자를 미워할 일도 없지만 설사 밉더라도 이기려면 적의 수를 눈으로 보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하나 그걸 포기했으니 젊은 5강이 선배인 조-서를 평생 꺾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응씨배를 만든 잉창치(應昌期)는 대만 바둑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한국 바둑이 강해진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필자는 ‘조훈현의 귀환’을 으뜸으로 꼽았다. 조훈현의 스승 후지사와 슈코는 “조훈현이란 진주가 진흙 속에 처 박혀 있다”고 한탄했으나 한국 바둑은 조훈현과 더불어 업그레이드 됐다. 그러나 조훈현도 그냥 가르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봉수란 특별한 존재로부터 아주 특별한 승부호흡을 배웠다. 서봉수는 물론 조훈현이란 ‘선생’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하나 조훈현도 서봉수라는 포기할 줄 모르는 2인자가 있어 칼이 녹슬지 않았고 훗날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봉수는 “내 가슴은 조훈현이 할퀴고 간 상처로 가득하다. 그러나 조훈현은 내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두 기사가 그토록 긴 세월의 애증 속에서 기어이 서로 멀어진 것은 가슴 아프다. 이제라도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만나 대화도 나누고 골프도 함께 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바둑이야기(서봉수③) - 10월 25일자에 계속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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