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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인도에 미쳤다 … 지리산서 신화인물 2000명과 함께한 15년

중앙일보 2012.09.15 00:32 종합 32면 지면보기
마하바라따

위야사 엮음, 박경숙 옮김

고전 『마하바라따』 세계 3번째로 완역한 박경숙씨

새물결, 전5권 각 권 308~632쪽

2만20000~2만70000원




인간사의 모든 이야기가 담겼다. 인도 고전이자 신화인 『마하바라따』(새물결)가 전세계 3번째로 한국에서 완역됐다. 원고지로는 5만 매, 책으로는 20권 분량이다. 이 방대한 원전을 번역하는 것은 고난과 수행의 길이 될 터. 15년 동안 『마하바라따』와 함께 살아온 역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 멀고 고됐다.



 전북 남원시내에서 차로 40분을 더 들어갔다. 지리산 산자락에 기대 오밀조밀 모여있는 산촌마을이다. 역자 박경숙(49)씨는 중학생인 둘째 딸과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었다. 남편과 큰딸은 전주에서 각각 직장과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는 2007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17년 동안 인도에 살며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다가 불현듯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인도에서 실어온 『마하바라따』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참고서적만 5㎏ 박스로 130개나 됐다.



지리산에서 텃밭을 일구며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박경숙씨. 지리산은 그에게 또 하나의 우주다.
 -왜 지리산으로 왔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거든요. 사람보다 공기가 많은 곳이 좋았어요. 도시는 공기보다 사람이 많잖아요.”



 -별 유혹이 없겠다.



 “산 내음이 유혹이죠. 봄에는 하루 종일 산에서 나물을 캘 때도 있어요. 그때는 번역 일을 못해요. 전남 강진 시골 출신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강진에서 아버지가 놀러 오셨는데 ‘왜 이런 오지에서 사냐’고 하시더라고요.”



  -대작 번역, 만만치 않은 일이다.



 “수세기에 걸쳐 구전되다 보니 이야기의 일관성이 없어요. 방금 죽었는데, 다시 멀쩡하게 살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름도 문제였는데, 인도인은 태양신을 부르는 이름만 108개예요. (책 전체에는 2000개가 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 이름을 모두 옮겨 적어야 하는 날엔 고추 밭에 나가 108개의 고추를 따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웃음)



 -인도에서 『마하바라따』는 어떤 책인가.



 “『춘향전』이나 『흥부전』보다 더 친숙하다고 할까요. 그들의 삶 속에 『마하바라따』주인공이 언제나 인용됩니다. 영화·드라마·소설 등의 원천이고요. 서양 사람도 상식처럼 『마하바라따』는 다 알아요. 한국인만 유독 낯설게 느끼는 거죠.”



『마하바라따』를 번역한 박경숙씨 집 외벽엔 불의 신 아그니가 그려져있다. 아궁이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는데, 고등학생인 첫째 딸이 그 자리에 그림을 그렸다. 아그니는 이그니션(ignition·발화)의 어원인데, 우리말 아궁이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오종찬 프리랜서]
 그도 나이 스물아홉에 인도에 가기 전까지는 이 작품을 몰랐다. 어릴 적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 독문과에 입학했고, 소설을 쓰겠다며 한참을 백수로 지냈다. 친구 따라 절에 갔다가 한 스님에게 ‘인간 부처’의 삶을 듣고 ‘부처처럼 다 버리겠다’며 무작정 인도로 떠났다.



 역마살을 뿌리치지 못하고 1년 동안 인도를 유랑했다. 그리고 “불교 경전을 공부하겠다”며 푸네(Pune)라는 도시에 정착해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처음에는 빨래줄에 걸린 빨래처럼 보이던 문자가 점점 친숙해졌다. 특히 산스크리트어의 세계는 수학부터 정치학 심지어는 도둑이 되는 법을 쓴 ‘도둑학’까지 깊고도 넓었다. 그 중 『마하바라따』가 으뜸이었다. 인도 신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면서 『마하바라따』는 일상이 됐다.



 -이 책의 매력이라면.



 “욕망을 절대 숨기지 않아요. 예컨대, 왕인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젊음을 주면 내가 왕국을 주겠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아들들이 다 거절을 하니까 저주를 해버리죠. 결국 막내아들에게 젊음을 빌려서 1000년 동안 실컷 놀고 나서 다시 돌려줘요. 막내 아들이 ‘뿌루’인데 그게 인도의 조상이 되는 거죠. 얼마나 솔직하고 재미있나요. 때로는 욕망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부끄럽기도 해요. 선악의 구분도 없어요. 권선징악이나 서구의 합리적인 틀로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작정하고 교훈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렇다고 보여주는 거예요.”



 『마하바라따』는 인도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이야기의 원천으로 꼽힌다. 일례로 제임스 캐머런은 영화 ‘아바타’에서 몇몇 모티브를 차용했고, 오랜 꿈으로 『마하바라따』를 영화화하고 싶다고 밝혔다. 할리우드 영화 ‘2012’ 역시 이 책 3장에 나오는 ‘세계 대홍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번안했다. 『삼국지』, 일본만화 ‘포켓몬’, 전래동화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무꾼’ 등 숱한 이야기의 원형이 들어있다.



 -바다를 휘젓고 산을 뒤엎고, 스케일이 크다.



 “인도인은 그걸 ‘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뻥’이 세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실화하는 게 탁월해요. 인도에서 이 책을 소설이라고 하면 큰일나요. 엄연한 역사죠.”



 -신들이 태어나는 과정도 상상 초월이다.



 “제대로(?) 태어난 신이 하나도 없어요. 알에서 태어나고, 항아리에서 나오고. 정액을 새가 물고 가서 임신을 시키고. 인도의 신화는 서구의 신화와 완전히 달라요. 사람과 우주와 자연과 신이 일체라고 봐요. 신도 인간보다 조금 초월적인 존재일 뿐이지, 인간처럼 성내고 질투하는 감정을 모두 갖고 있어요.”



 -이 작품을 알고 나서 인생이 달라졌나.



 “거대한 우주가 내 안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만큼 인간도 큰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세상엔 모든 일이 벌어질 수 있구나, 관대함 같은 게 생긴 거죠.”



 아닌 게 아니라, 박경숙과 그 가족의 삶 속엔 『마하바라따』가 진득하게 녹아있었다. 엄마의 영향을 받은 둘째 딸 두메(15)는 청소년을 위한 『마하바라따』 영어 판본을 한국어로 번역 중이다. 역자는 앞으로 10년 안에 초역본을 매만져 나머지 열다섯 권을 펴낼 계획이다. 역마살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오랫동안 이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지 물었다.



 “역마살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책 자체가 ‘우주적 역마살’을 보여주거든요. 딱 내 스타일이죠.”



◆마하바라따



‘위대한 바라따의 탄생 이야기’란 뜻으로 기원전 10세기,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바라따족의 왕위계승 전쟁을 담은 서사시다. 이야기의 기

둥은 왕권 다툼이지만 인도인의 정신과 사상, 신화와 전설과 역사, 우주관 등이 담긴 수천 개의 에피소드가 곁가지처럼 이루어져있다. 수 세기에 걸쳐 구전되며 ‘집단지성’의 힘으로 완성됐다. 위야사는 최종 편집자로 알려져 있다. 인도인은 “『마하바라따』 안에 있는 것은 이 세상에도 있고, 『마하바라따』 안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도 없다”고 믿는다. 총 18장이며, 한국판은 현재 5권까지 나왔고 총 2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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