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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남·북·러 가스관 추진 때가 왔다

중앙일보 2012.09.15 00:23 종합 37면 지면보기
한국-북한-러시아를 잇는 가스관 사업을 추진해야 할 대외적 여건이 성숙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일 현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러 가스관 사업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대내적으로 이 사업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참여정부(2003~2008년) 시절에는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2기(2004~2008년)였던 당시 러시아에선 보리스 옐친 대통령 집권기(1991~99년)에 국부를 지나치게 헐값에 외국에 넘겼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가 안 맞았던 것이다.



 그러던 러시아는 2007년 ‘동부가스프로그램’을 확정하고 남·북·러 가스관 사업의 추진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북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정치적 의도, 가스 수출선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경제적 이유,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 필요성 등이 맞물리며 러시아 정부는 이 사업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말 그대로 때가 온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내세워 극동 개발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데도 한국은 아직 남·북·러 가스관 사업의 유효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논란만 무성할 뿐이다. 이 사업이 한국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시대적 과업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는 숫자로만 가늠할 수 없는 무수한 연관 효과가 있다.



 이 사업은 철도와 전력 연결 등 다양한 연쇄 효과를 낼 수 있으며 남북 경협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한국이 해양과 대륙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남·북·러 및 아태 지역을 아우르는 신성장 동력을 발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 정부는 경색된 남북관계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왔다. 적극적인 노력이나 정치적 결단 없이 실무 주체인 양국 공기업 간의 상업 협상만 진행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상업 협상도 결코 간단치 않다. 수입국과의 공급계약을 먼저 체결하고 나중에 생산과 배관공사에 들어가는 PNG(파이프라인 천연가스)의 특성상 공급가격 결정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예로 가스 공급가격에 얹는 통과료(공급국이 통과국에 지급하는)의 경우 산출 방식에 따라 크게는 3배까지 차이가 난다. 수입국(한국)과 통과국(북한) 간 직접 대화채널 없이 이러한 협상을 공급국(러시아)에만 맡겨둔다면 그 역할 비용까지 공급가격에 포함된다. 남북대화가 끊긴 상황에서 지금 한국은 대단히 불리한 상업 협상을 러시아와 하고 있다.



 앞서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를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으로 보내는 사업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시 중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협정서들을 살펴보면 수입국인 중국이 거의 모든 사안에서 주도권을 쥐고 통과국들과의 협상을 주도했다. 주도권을 쥐었던 중국은 이 사업을 2년 안에 마쳤다.



 러시아 가스관의 북한 통과와 관련해 남북 간 직접대화만 재개된다면 전문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통과국인 북한과의 다양한 협력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예로 북한에 통과료 일부를 실물(가스)로 주고 우리 측이 북한의 가스 사용시설 건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이렇게만 된다면 한국의 대러 상업협상 능력은 월등히 높아지게 될 것이다. 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우리 민족이 통일로 가는 고속도로이자 대륙국가로 가는 꿈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이 유 진 러시아 변호사·국제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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