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박근혜의 가장 큰 적은?

중앙일보 2012.09.15 00:20 종합 38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1975년 4월 9일 서도원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등 8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상고가 기각돼 사건 관련자 23명 중 8명에게 사형이 확정된 후 불과 18시간 만의 일이었다. 그날의 일을 당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던 한승헌(전 감사원장) 변호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날따라 구치소가 너무 고요하고 이상했어. 나중에 배식을 온 ‘소지(청소·배식을 맡는 일반사범 기결수)’가 귀띔을 해줬어. 새벽부터 줄줄이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이 사형당했다고. 기가 막혔어요.”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 95년 한 방송국이 행한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 당시 ‘우리나라 사법 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혔다. 이뿐만 아니라 국제법학자회는 이 사건을 ‘사법살인’으로 규정하고 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바 있다. 이에 2005년 12월 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여 2007년 1월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아울러 같은 해 8월 이 사건 희생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법원은 국가가 총 637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 지난 10일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박근혜 후보는 “인혁당 사건 유족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법원의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 … 같은 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답했다. 두 가지 판결이란 75년과 2007년의 판결을 말함인 것 같은데, 두 가지가 아니라 2007년 판결이 최종이다.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의 증언이라 함은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범진 전 의원의 언급과 역시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인 박현채 당시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부터 교육받은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의 주장인데 이들은 인혁당이 남한 내의 공산혁명조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제1차 인혁당에 관한 것이지 10년 후의 제2차 인혁당, 즉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는 동일한 궤에서 다룰 수 없는 것들이다. 아니 설사 그들이 혁명조직이었다 해도 확정 판결 후 18시간 만에 전격 사형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최소한 그 시대가 미쳤던 거다.



 # 물론 혹자는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나 가해자는 아니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의 일을 가지고 너무나 시시콜콜 따져 묻는 것은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더 심하게는 그것 역시 정치적 연좌제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뿌리를 부정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 뿌리가 좋든 싫든 그 시대를 움직여온 중추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 시대가 자행한 참으로 아픈 상처에 대해 일정한 책임의식을 통감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단지 ‘나의 아버지 시대의 일’, 혹은 ‘차후에 재평가될 대상’으로 일정 거리를 둔 채 판단을 유보시킬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것이 회피할 수 없고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준엄함이다.



 # 박근혜 후보는 누가 뭐래도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다. 그런데 박 후보의 가장 강력한 적은 안철수 원장도, 문재인 의원도 아니다. 아마 그녀의 가장 큰 적은 역사 그 자체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 자체를 자신의 적으로 만드는 이가 대권을 거머쥐기는 어렵다. 자고로 최고의 리더의 진정한 덕목은 ‘네체시타’, 즉 ‘시대의 요구, 역사의 필요’이기 때문이다. 박 후보가 경선 이후 대화합의 행보를 자임해 왔다면 사람과 집단과의 화해만이 아닌 역사와 시대와의 화해도 의당 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정진홍 논설위원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더 보기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