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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한국 정당? 재벌의 도플갱어다

중앙일보 2012.09.12 00:01 종합 38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재벌 회장이 지방에 있는 현장에 갔다가 본사에 근무하던 간부 A와 마주쳤다.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예. O월O일자로 인사발령이 나서….” 며칠 뒤 A는 본사로 배치됐다. 회장의 말을 전해 들은 인사 담당 임원이 ‘본사 근무시키라’는 뜻으로 알고 발령을 낸 것이다. 회장이 본사에서 다시 A와 마주쳤다. “자네, 본사에 웬일인가?” A는 즉시 지방으로 가야 했다.



 재계에서 전설처럼 전해 오는 일화다. ‘회장님의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준다. 지금도 회장님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서울서부지법은 지난달 16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수천억원대의 횡령·배임이 “김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지휘체계에 따라 이뤄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근거로 “압수 문서에 따르면 김 회장을 가리키는 ‘CM(체어맨)’은 신(神)의 경지이고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라고 제시했다. 이에 한화 측은 “신이란 표현은 워크숍 강의를 맡았던 임원의 메모일 뿐”이라고 했다.



 사기업에서 회장을 ‘신’이라 부르든, ‘CM’이라 부르든 상관할 일은 아니다. 일부 종교가 유사 기업이듯 기업도 유사 종교가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경제의 리스크로 작용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부 소통이 막혀 위기 대응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된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기업 회장 사건을 맡으면 왜 그렇게 답답하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당연히 보고돼야 할 사안인데도 회장한테 깨질까 봐 아무 말도 못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어요. 고양이 목에 왜 자기가 방울을 달아야 하느냐는 거죠. 구속, 실형이 불가피한데도 임원들이 있는 대로 보고하지 못합니다.”



 이래서야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울려도 대처하지 못한다. 바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강경론이 득세한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충성심 부족”으로 공격 당할 수 있다. 왜곡된 충성 경쟁이 오히려 CEO(최고경영자), 나아가 기업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다. 아찔한 건 이렇게 취약한 의사결정 구조에 수만, 수십만의 밥줄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시야를 정치로 넓혀보면 이런 도플갱어(똑같이 닮은 판박이)가 없다. 한화 사무실에서 발견됐다는 문서 혹은 메모 내용은 불법사찰 수사 과정에서 나온 총리실 문건과 그대로 겹쳐진다. “VIP(대통령)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조직”이란 문구엔 전근대적인 인식이 담겨 있다. 대기업을 상대로 ‘경제민주화’를 밀어붙이겠다고 벼르고 있는 여야 정당은 어떨까. 당내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후보가 선출된 뒤 사실상 ‘1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국립현충원·봉하마을 참배 사진들을 보면 박 후보를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함이 느껴진다. 호남지역과 평화시장을 찾는 ‘대통합’ 행보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이라면 비박(非朴)과 같은 당내 반대 목소리부터 경청해야 한다. 정치쇄신특위가 돈 공천 비리에 대해 50배 과태료 등 근절책을 내놓았으나 당내 민주화의 핵심인 공천권 독점 포기와는 거리가 멀다.



 민주통합당도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후보 경선이 계란으로 얼룩지더니 “우리는 유신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다”(손학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제 의총 참석자들은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 체제의 소통 부재를 비판했다. 여야를 떠나 당직자와 의원들을 계열사 임원으로 여겨서는 민주정당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미국은 후보 지명 전당대회에 차기 주자가 등장한다. 우리 정당들은 5년 후 다시 정치권 밖에서 제2, 제3의 ‘안철수’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회장님, 후보님만 보이는 데칼코마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경제민주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화가 진행돼야 한다. 그래야 정당 정치가 자리 잡을 수 있고 재벌 개혁을 요구할 도덕적 권위도 확보된다. 어떤 이름의 민주화든 목표를 이뤄 나가는 주체가,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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