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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미·중 냉전과 동아시아 혼전

중앙일보 2012.09.10 00:30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 국제정세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로부터 독일 통일까지 40여 년간 세계를 동서 두 진영으로 갈라놓았던 미·소(美·蘇)냉전의 막이 내려간 지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의 관계가 2차 냉전으로 진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영토분쟁과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이 지역의 평화와 발전은 물론 국제질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혼전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냉전과 혼전이 겹쳐진 이중적 위협의 성격을 어떻게 진단하고 대처할 것인가.

 우리가 당면한 이중적 위협의 성격은 제국주의 시대의 전통과 유산이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어떤 형식과 동력으로 작동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해야 한다. 본래 강대한 대륙국가는 그 지정학적 위치와 규모는 물론 경제력 때문에라도 제국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동서냉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유일 초강대국으로 21세기를 맞았던 미국과, 19세기 말부터 식민주의 세력의 진출과 압력으로 적지 않은 수모를 겪다가 20세기 후반 들어 정치통합을 이루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며 제국의 면모를 되찾게 된 중국이 대륙국가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렇듯 제국의 전통과 여건을 갖춘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의해 세계사의 향방이 좌우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기에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는 미·중 관계가 갈등과 협조 두 갈래 길목에서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느냐에 주목되고 있다. 며칠 전 호주의 맬컴 프레이저 전 총리는 미·중 관계의 앞날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미국이 2500명 규모의 해병대를 호주 다윈에 주둔시키기로 이미 합의하였고 핵전력을 구비한 항공모함 등을 호주 서부 군항에 기항하도록 기획하는 것은 결국 중국을 제어하고 압박하는 전략적 포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새로운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것이다. 군사 및 경제대국으로 급속히 부상하는 중국의 팽창을 이 시점에서 견제해야 되겠다는 미국의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할 뿐 아니라 새로운 냉전으로 이어질 전망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이저 전 총리의 입장은 9·11의 충격,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전, 그리고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파동 및 경제불황 등 미국의 자존심이 입은 상처로 말미암아 미·중 관계를 충돌로 몰고 가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견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미·중 관계의 미래는 미국뿐 아니라, 아니 미국보다도 오히려 중국의 입장과 전략이 어떤 내용과 방향으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중국이 개방된 시장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전략을 견지하고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는 정치개혁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면서 아시아공동체의 전진에 앞장선다면 미·중 관계는 냉전을 넘어 공동번영의 세계사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희망적 미래 전망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날로 격화되는 한·중·일, 그리고 아세안 국가들의 뒤얽힌 영토분쟁과 역사인식의 갈등 때문이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혼전상태는 정리되지 못한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 새롭게 돋은 민족주의의 탄력을 받고 양성화된 결과다. 중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겪었던 외세 침략의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아시아의 리더로서 의연한 자세를 잡는 데 주저하고 있다. 모든 동아시아 국가가 예외 없이 중국의 이 지역 유일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수용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로 향한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는데 왜 핵무기 확산 시도를 방치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편 후진 지역을 식민지화하여 마구 수탈하였던 서구 제국주의를 통째로 모방하며 군국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어 바로 이웃인 한국과 중국을 무도하게 침략한 일본은 그러한 과거사를 청산하기보다는 보전하려는 듯 엉거주춤한 내셔널리즘에 불을 지피고 있다. 제국주의시대 유산인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67년이나 감내하고 있는 한국의 민족주의도 이렇게 뒤얽힌 국제관계 속에서 온전한 제 모습을 지켜가기는 결코 쉽지 않은 형편이다.

 지정학적 여건의 산물이든, 시대적 이념으로 포장된 곡절이든 간에 역사를 재인식하고 방향을 재조정하는 것은 나라마다 각자 상황에 맞춰 대응해가야 하는 고유 과제다. 남들의 충고나 비판은 아무리 옳다 하여도 어려운 상황은 더욱 꼬여갈 뿐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특히 이웃 나라 국민의 이성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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