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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65’의 혁명이 시작됐다

중앙선데이 2012.09.09 03:59 287호 31면 지면보기
“요즘 미국에서 ‘특허번호 174465’의 혁명이 시작된 것을 아시나요.”
며칠 전 정보기술(IT) 업계 모임에서 만난 방송통신위원회의 한 공무원이 던진 얘기다. 무슨 얘기일까. 글로벌 IT 시장에서 세기의 기술 전쟁으로 불리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소송을 말하는 것으로 알았다. 아니다. ‘174465’는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한 뒤 받은 특허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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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년이 지난 지금 무슨 혁명이 일어나고 있나. 최근 미국 이동통신 1위 회사인 버라이즌이 상품가격(요금) 체계 기준을 확 바꿨다. 요금을 산정하는 기반을 음성 통화량에서 무선 데이터 사용량으로 변경한 것이다.

통신요금 기준을 바꾼 것은 전화 등장 이후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관련 업계에선 혁명이라고 부른다. 버라이즌이 전화회사 타이틀을 버렸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버라이즌은 음성통화는 아예 무제한으로 풀어주고, 데이터 사용량에 따른 요금만 받는다.

글로벌 통신 시장은 그런 트렌드로 가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전화를 찾아보면 ‘음성을 전기 신호로 바꿔 전송한 뒤 이를 재생해 통화하는 기술’로 나온다. 스마트폰이 그런 의미의 전화일까. 특허 소송으로 공방전을 벌이는 삼성전자와 애플도 단순한 음성통화 기술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사실 데이터 기반의 통신요금 기준 체계는 꼬여 있는 여러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도 있다. 가령 데이터를 사용하는 만큼 요금을 받으니, 공짜 무선 인터넷 전화인 ‘카카오톡’ 같은 서비스를 막을 이유도 없다. 인터넷 업계와 첨예하게 갈등을 빚는 망중립성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국내 통신회사들은 어떨까. 통신업계가 데이터 기반 요금제라는 혁신을 주저한다. 생소한 요금 체계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권과 여론의 반응이 미지수여서다. 수시로 요금을 내리라는 정치권이나 여론의 압박이 좀 고달프기는 하지만, 현행 요금체계로도 당분간은 짭짤한 수익을 낼 수 있어서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IT 업계의 한 인사는 “통신회사 대부분은 ‘전화’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며 이런 급박한 흐름을 외면하고 음성통화 요금 체계를 그대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버라이즌을 요즘 인기 TV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의 ‘용감한 녀석들’로 표현했다. 반면 IT강국으로 자부하는 한국의 통신회사들은 전통적인 전화 비즈니스인 속칭 ‘빨랫줄 사업’에만 집착하고 정치권이나 여론 눈치만 보는 ‘우울한 겁쟁이’란다.

전화 서비스의 원조국인 미국에서 ‘특허번호 174465’의 혁명이 시작됐다. 통신회사가 이런 흐름에 계속 눈과 귀를 막을 수 없다. 처음엔 괜히 귀찮고, 자칫 손해를 볼 수도 있어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때를 놓치면 영원히 뒤처진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넘나드는 애플이나 174465의 혁명에 나선 버라이즌을 봐라. 통신업계가 말로만 탈(脫)통신을 외치지 말고, 진정으로 디지털 콘텐트 위주의 혁신에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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