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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용인술

중앙선데이 2012.09.09 03:58 287호 31면 지면보기
제갈량이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치는 모든 사람의 의견 제시가 이루어져야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논쟁이 두려워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 꺼린다면 결국 나라가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많은 사람의 생각을 모으면 유익함이 커진다는 ‘집사광익(集思廣益)’이란 말이다. 역사적으로 ‘집사광익’에 가장 열심이었던 리더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었던 듯하다. 링컨은 대통령직을 수행한 5년간 백악관을 떠나있었던 기간을 다 합쳐봐야 한 달도 못된다. 자신의 스케줄을 스스로 짜고 편지도 직접 작성하곤 했던 것인데 전쟁 비용에 보태려고 스태프 수를 줄였기에 일에 파묻혀 지낸 것이다. 이 짧은 기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주요 국가관리시스템도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집사광익’을 위한 폭넓은 인재 등용 덕분이었다.

김재명 전 전북 정무부지사

하딩은 링컨 전기에서 “그는 결단코 사람을 좋고 나쁨에 따라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조차 어떤 직위에 적합한 사람이라 판단되면, 거침없이 상대를 기용했다. 나는 링컨이 자기의 정적이어서 또는 자신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인사이동을 망설이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제일 먼저 예상을 깨고 정적인 더글러스를 순회특사로 임명하여 연방정부가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각주에 설명케 했다. 천하 사람들이 더글러스는 링컨과 노예제도에 관한 한 정치적 견해가 반대였던 인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 정적을 자신의 특사로 택해 전쟁의 필요성을 설명하도록 한 것이다. 링컨도 놀랍지만 기꺼이 그 일을 수행하고 돌아와 여행 후유증으로 죽은 더글러스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또 자신을 ‘레일 침목꾼’ 정도로 무시하던 선배 국회의원 윌리엄 시워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고 대통령 경선 패배로 평생을 링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새먼 체이스를 재무장관으로 내정했다.

그 자신에 대한 악감정을 모를 리 없는 링컨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시워드가 남부에 기울어지던 유럽 국가들과 외교전을 통해 남부를 훌륭히 고립시켰고 전쟁 후에는 알래스카 땅을 러시아로부터 에이커당 2센트씩, 총 720만 달러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시워드의 별장” “시워드의 아이스 박스”라는 조롱을 받았던 알래스카는 미국 개국 이래 최대의 대박이 되었다. 체이스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인컴택스(Income Tax)를 처음 도입한 데 이어 ‘지폐’를 발행하여 오늘날의 통화시스템을 완성시켰다. 당시 불가능할 것 같았던 5억 달러의 전시국채(戰時國債)도 성공시켰다. 오늘날의 미국 은행 시스템은 100% 그의 업적이다.

전쟁을 직접적으로 승리로 이끌었던 그랜트 장군. 그는 원래 지독한 술주정뱅이였다. 술 때문에 대위 시절 군생활을 접었다. 부동산 중개인부터 가죽제품 상점 점원까지 해봤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자포자기하여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주 방위군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회생의 시작이었다. 몇 차례 전투의 승리로 링컨의 눈에 들어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술병을 놓아본 적은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그랜트가 1862년 실로전투에서 대패하자 온 세상이 그랜트보다 링컨을 비난했다. “술고래에게 파면을!!!” 세상이 그랜트를 등졌지만 끝까지 감싸 안은 이가 링컨이었다. 링컨의 인내와 신뢰가 그랜트에게 큰 힘이 되어 그는 빅스버그 전투에서 대승했다.

그랜트는 최초의 육사 출신 미국 대통령으로 두 번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링컨은 인재 활용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링컨의 끌어안기식 용병술이 차제에 우리나라에도 일상이 되어 정치민주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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