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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의 뿌리, 전쟁기계 양산한 육군유년학교

중앙선데이 2012.09.09 03:36 287호 26면 지면보기
일본육군중앙유년학교, 일본은 13~14세의 어린 소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유년학교 출신들이 일본을 군국으로 몰아가고 전 세계를 전화에 뒤덮이게 한다.
1930년 10월 1일 일단의 일본 정치군인들이 사쿠라회(櫻會:벚꽃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비밀조직을 결성한 핵심인물은 군 장성이 아니라 중좌에 불과한 하시모토 긴코로(橋本欣五郞:1890~1957)와 소좌인 초우 이사무(長勇:1895~1945) 등이었다. 하시모토 긴코로는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초우 이사무는 1945년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에게 쫓긴 끝에 동굴에서 할복하고 만다.이들의 인생 궤적을 이해하려면 어린이들을 전쟁기계로 만들었던 일본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를 주목해야 한다. 13~14세 어린아이들에게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시키던 비정상적인 교육시스템이 육군유년학교였다. 1870년(조선 고종 7년, 메이지 3년) 요코하마어학연구소(<6A2A>浜語學<7814>究所)를 오사카병학료(大阪兵學寮)에 편입시킨 것이 시초였으니 어린이 군사교육의 뿌리는 생각보다 꽤 깊다.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만주국① 사쿠라회와 천검당

1887년 육군 유년학교 관제를 제정하고 청일전쟁 이후인 1896년에는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 외에 도쿄, 센다이(仙台),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 구마모토(熊本) 등지에도 육군지방유년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당 학생 수는 대략 50명 남짓으로 중앙유년학교는 14세부터 2년간, 지방유년학교는 13세부터 3년간 교육시켰다. 제복에 금성(金星) 마크를 달아서 ‘별의 생도(生徒)’라고 불렸다. 민간에서는 ‘육군중학교(陸軍中學校)’라고 별도로 취급했다.

1 하시모토 긴코로. 사쿠라회의 결성을 주도했다.2 오가와 슈메이. 일본 청년 장교들에게 쿠데타를부추긴 우익 사상가다.
일본 육군은 문부성 산하에서 자유교육을 받은 중학교 출신은 믿을 수 없다는 관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교습강령(敎習綱領)에는 “제국 육군의 장교가 될 자를 가르쳐 완성시키는 곳이다…제국 군대의 정신력은 유년학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장교 중에서 유년학교 출신 비율이 3분의 1이나 돼 육군에서 출세하려면 참모장교 양성기관인 육군대학교 졸업 여부보다 육군유년학교 출신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까지 있었다. 육·해군 사관(士官)의 자녀들은 학비가 반액이었고, 전사자 자녀는 전액 면제를 해줘서 군인 집안 자제들의 입학을 유도했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당시 육군유년학교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례가 1923년 관동(關東)대지진 때 헌병대위 아마카쓰 마치히코(甘粕正彦:1891~1945)에게 살해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1885~1923)다. 오스기 사카에는 군인이었던 부친 오스기 히카시(大杉東)의 권유로 열네 살 때인 1899년 나고야 육군지방유년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기질에 군사학교 분위기가 맞을 리가 없어서 학교 밖에 나가면 쾌활한 소년이었지만 학교에 돌아오면 흉포한 기분이 되었다고 전한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육사 출신의 중견 장교들이 문민정치의 통제를 벗어나 만주사변 등을 도발하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오스기 사카에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니가타(新潟)현 시바타(新發田)의 자유로운 하늘을 본다’는 망상에 시달린 나머지 군의관으로부터 뇌신경질환이란 진단을 받기도 했다. 급기야 1901년 동급생과 칼부림 사건을 일으켜 퇴학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감수성을 모두 억제하고 전쟁기계로 변모해야 살아남을 수 있던 육군유년학교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오스기 사카에를 살해한 극우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치히코도 같은 나고야 육군지방유년학교 출신이었다. 아마카스가 유명한 아니키스트 오스기 사카에가 한때 자신의 선배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는 점에서 이는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오스기와 전쟁기계로 변모한 아마카스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시모토 긴코로와 초우 이사무는 모두 구마모토(熊本)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각각 일본 육사 23기(1911)와 28기(1916)로 졸업했다. 사쿠라회 결성 당시 도쿄 경비사령부 참모였던 히구치 기이치로(<6A0B>口季一郞)도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사를 졸업한 인물이었던 것처럼 사쿠라회의 주요 멤버 대부분이 육군유년학교 출신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13~14세 때부터 군인으로 길러졌던 이들이 이후 만주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전쟁기계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100여 명의 중견 장교로 결성된 사쿠라회는 회원 자격을 “현역 육군 장교 가운데서 중령 이하 계급자로서 국가개조(國家改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심 없이 노력한 사람에 한정한다”라고 규정했는데, 이들이 내건 ‘국가개조’의 다른 말이 소화유신(昭和維新)이다. 소화(昭和)는 일왕 히로히토(裕仁:재위 1926~1989)의 연호인데 소화육군(昭和陸軍)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화유신과 국가개조운동, 좋게 표현해서 청년장교운동은 동의어였다.

이들이 ‘천황봉대(天皇奉戴)’를 명분으로 각종 쿠데타를 기도하고 국가개조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군국(軍國)으로 만들어 만주와 중국, 아시아 전역을 침략하고 끝내 진주만까지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것이 소화시대 일본의 내면이었다. 소화유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軍國)으로 일본을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소화유신의 또 다른 특징은 전쟁기계로 길러진 청년장교들에게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1886~1957), 기타 이키(北一輝:1883~1937) 같은 국가주의적 관점의 우익 사상가들이 정신적 세례를 주었다는 점이다.

청년 장교들이 군부 파시스트라면 이들 우익 사상가들은 민간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지금도 독도 문제를 도발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뿌리다. 오가와 슈메이는 전후 도쿄 전범(戰犯)재판 때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기소 당시 잠옷 차림으로 맨발에 게다를 신고 출정해서 전쟁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뒤통수를 여러 번 때린 일화로 유명하다. 미군 병원 주치의였던 우치무라 히로유키(<5185>村祐之)는 그를 ‘매독에 의한 정신질환’으로 판정했지만 석방되자마자 정신이 멀쩡해진 사이비 사상가이기도 하다.

우파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던 만철(滿鐵:만주철도) 조사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오가와는 서양에 맞서자는 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이들의 아시아주의는 아시아의 권익을 중시하자는 뜻이 아니라 일본이 전 아시아를 차지하는 ‘아시아의 통일’을 이루고 그 힘으로 서양과 맞서야 한다는 침략주의이자 호전(好戰)주의였다.
오가와 슈메이와 깊은 친분이 있던 기타 이키는 좌에서 우를 넘나든 민간 파시스트였다. 원래 기타 데루지로(北輝次<90CE>)였던 본명을 기타 이키(北一輝)로 바꾼 이유는 한때 중국 혁명에 참가해 중국 혁명가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중국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기타 이키는 1936년 발생한 2·26 쿠데타 미수사건에 개입했다가 민간인으로서는 드물게 사형당한다. 이키가 1906년 출간한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國體論及び純正社會主義)는 사회주의자였던 가와가미 하지메(河上肇)의 칭찬을 받을 만큼 한때는 사회주의에 경도됐다.

그러나 이키는 1923년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을 쓴 이유에 대해 “좌익 혁명에 맞서 우익적 국가주의로 개조할 필요성에서 썼다”라고 말할 정도로 극우로 돌아섰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은 쿠데타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가사회주의 정체(政體)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창함으로써 일본 극우세력의 경전(經典)이 되다시피 했다. 이키는 한편으로는 일련종(日蓮宗:니치렌주)의 열렬 신도로도 유명하다.

2·26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사형당하는 또 한 명의 민간인이 니시다 미쓰지(西田稅:1901~1937)다. 니시다 미쓰지는 1918년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육사를 34기(1922)로 졸업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육사 졸업 후 함경북도 나남(羅南)에서 기병대로 근무하기도 했던 이 전쟁기계는 24세인 1925년 늑막염으로 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군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니시다는 오가와 슈메이가 1924년 4월 도쿄 남청산(南<9752>山)에 설치한 행지사(行地社)의 부속 청년교육기관인 대학료를 맡아서 청년장교들에게 우익 국가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면서 기관지 일본(日本)을 발간했다. 2년 후 기타 이키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집에 사림장(士林莊)을 설치해 청년장교들의 단골 집회소로 삼게 된다.

일본 청년장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니시다는 ‘시국이 중대한 국면에 이르렀다’면서 대개조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망국의 화근이 되고 있는 정당정치인, 재벌, 군벌(軍閥), 학벌(學閥)’에 대해서 모든 장소에서 폭동, 소란, 암살, 태업 등의 방법으로 절대혁명을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니시다는 1927년 9월 사림장에서 오오기시(大岸賴好), 후지이 히토시(藤井齊:1904~1932) 등 각 지역의 청년장교 71명으로 천검당(天劍黨)을 결성하려다가 헌병대의 사전 탐지로 실패한다.
그러나 사쿠라회와 천검당을 만들려던 이 세력들은 이후 일본을 군국의 길로 끌고 가는 핵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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