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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판의 힘! 인간을 '수퍼 협력자'로 진화시키다

중앙선데이 2012.09.09 03:33 287호 25면 지면보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 그는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 가서 병원과 학교를 짓고 선교 활동을 하다 47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중앙포토]
회중시계, 바이올린, 4륜 마차. 1876년 표트르 크로포트킨(1842~1921)이 탈옥할 때 사용된 소도구들이다. 감옥에 면회를 온 여인이 그에게 건네 준 회중시계 안에는 탈옥 계획이 적힌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죄수의 동지들은 여인이 켜는 바이올린 선율에 따라 행동에 옮겼다. 크로포트킨은 4륜 마차를 타고 멀리 도망쳤다.
귀족 출신인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지하 활동을 한 끝에 구금된 것이다. 탈옥 후에 유럽을 떠돌다가 말년에는 집필 활동에 전념해 1902년 상호부조론(Mutual Aid)을 펴냈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의 이론을 두둔한 글을 읽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 홉스는 1651년 펴낸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늑대”라고 주장했다. 인간 생활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 되었다는 뜻이다. 크로포트킨은 인간 본성을 투쟁적인 것으로 간주한 홉스와는 달리 협동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상호부조론을 집필한 것이다.

이인식의 '과학은 살아있다' ④ 이타주의의 기원


크로포트킨이 이 책에서 제기한 주제는 오랫동안 생물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와 일맥상통한 것이다. 협동에 입각한 개체의 이타적 행동은 경쟁을 강조하는 진화생물학에서 볼 때 하나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생물학에서 한 개체가 이타적이라는 것은 그 개체가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타적 행동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일벌은 꿀을 훔쳐가는 침입자에게 침을 쏘고 스스로 죽는다. 일벌의 살신성인적인 행동은 집단의 식량 창고를 지켜냈으나 당사자는 그 이익을 공유하지 못하므로 이타적이라 할 수 있다. 협동은 상이한 종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빈 고둥 껍데기 속에 사는 집게는 그들 등에 말미잘을 짊어지고 산다. 말미잘은 게의 음식물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먹고 사는 대신에 독이 있는 자신의 촉수로 게를 보호해 준다.

버핏, 게이츠 (왼쪽부터) [중앙포토]
이와 같이 수많은 생명체가 협력한다는 사실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진화론에서 볼 때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기적 개체로부터 이타적 행동이 출현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생물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상호 이타주의 이론과 죄수의 딜레마
생물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혈연선택(kin selection)과 상호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이 유명하다. 1930년대부터 여러 생물학자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1964년 영국의 윌리엄 해밀턴(1936~2000)에 의해 체계화된 혈연선택 개념에 따르면, 혈연으로 연결된 개체들은 구성원의 번식 성공도(어떤 개체에서 살아남는 자손의 수)를 전체적으로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상호 협력하거나 이타적인 혜택을 베푼다. 요컨대 동물들은 공유한 유전자를 영속시키기 위해 가까운 친척을 돕는다. 그러나 혈연선택 개념은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1971년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혈연관계가 없는 개체 사이의 협력을 설명하기 위해 상호 이타주의 이론을 발표했다. 상호 이타주의의 기본은 “네가 나의 등을 긁어주면, 내가 너의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호혜적 행동이다. 트리버스는 상호 이타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게임을 내세웠다. <그래픽 참조>

1950년 창안된 이 게임에서는 가령 당신과 당신의 공범자가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각자 다른 감방에 갇혀 있고 검사가 두 사람에게 똑같은 제안을 한다.
“무죄를 주장하더라도 정황 증거가 충분하므로 모두 2년 징역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유죄를 자백하고 무죄를 주장하는 공범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기 쉽도록 협조한다면, 당신을 무죄로 풀어주겠다. 보복은 두려워 말라. 공범자는 5년을 감옥에서 썩을 테니까. 하지만 둘 다 유죄를 인정하면 똑같이 4년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런 딜레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유리할까. 공범자가 무죄 주장을 하면 당신은 유죄 자백이 유리하다. 당신은 석방되고 공범자는 5년형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범자가 유죄를 자백하면 당신의 무죄 주장은 불리하다. 공범자가 풀려나는 대신 당신이 5년형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경우 모두 언뜻 보아 유죄 인정이 유리할 것처럼 판단된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공범도 유죄 인정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석방되기는커녕 4년형을 받게 되므로 무죄를 주장했을 경우보다 옥살이를 2년 더 하게 된다.

죄수의 딜레마 같은 상황은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되풀이해서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이 이른바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iterated PD)이다.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협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한마디로 이기적 세계로부터 협동이 생겨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가장 설득력 있게 내놓은 사람은 미국 정치학자인 로버트 액설로드이다. 그는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에서 이기적 개체로부터 협력을 끌어내는 가장 우수한 전략으로 심리학자인 아나톨 라포포트가 개발한 팃포탯(Tit for Tat)을 제시했다.

‘맞받아 쏘아붙이기’ 또는 ‘대갚음’을 뜻하는 팃포탯은 “처음에는 협력한다.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그 전에 행동한 대로 따라서 한다”는 두 개의 규칙으로 구성된다. 팃포탯은 한마디로 당근과 채찍 정책의 요체를 합쳐 놓은 전략이다. 1984년 액설로드는 연구 결과를 정리해 펴낸 협력의 진화(The Evolution of Cooperation)에서 “상호 협력은 이기주의자들의 세계에서 출현할 수 있다. 그것은 호혜주의에 입각한 개체들의 집단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거래·계약·교환·분업·양보·신뢰·의무·빚·우정·선물·은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듣는 이 낱말들 속에는 호혜주의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1996년 영국의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가 펴낸 미덕의 기원(The Origins of Virtue) 에 적절히 표현된 바와 같이, 인간은 “유일무이하게 상호 이타주의에 익숙한 존재”이다. 그렇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고난 장사꾼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호혜주의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타적 행동이 수두룩하다. 텔레비전에 병든 아이들의 딱한 사정이 소개되면 성금을 내는 통화량이 급증한다. 거리에서 헌혈하는 시민도 자주 보게 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젊은 무명용사들이 누워 있다.

이기적이지만 더불어 살 줄 아는 존재
생물학자들이 혈연선택 또는 상호 이타주의 이론으로 이러한 제3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지 못함에 따라 실험경제학자들이 나섰다. 1982년 최종제안 게임(ultimatum game)이 개발되었다. 이 게임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을 격리시켜 놓고 진행된다. 먼저 갑에게 가령 100만원을 주고 생면부지인 을에게 일부를 나눠주도록 요구한다. 을 역시 전체 액수가 100만원인지 알고 있다. 을은 갑이 제안하는 액수가 만족스러우면 수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을이 갑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갑과 을 모두 한 푼도 챙길 수 없다.

귀하가 갑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90만 원을 갖고 10만 원 정도만 을에게 주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을이 10만 원이 너무 적다고 거절하면 당신은 90만 원은커녕 단 1원도 챙길 수 없다. 한편 을의 입장에서도 액수에 불만을 품고 갑의 제안을 거절하면 10만 원은커녕 단 한 푼도 건질 수 없다. 요컨대 갑은 자신의 몫을 최대한 늘리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묘안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실험경제학자들은 갑이 을에게 제공한 몫은 22~58%임을 밝혀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을이 갑의 제안을 수락 또는 거절하는 이유가 개인적 이해 타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공평성이 거래를 성사시키는 중요한 판단 기준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평하게 행동하지 않는 불로소득자(free rider)를 철저히 응징하지만, 페어플레이를 하는 상대에게는 기꺼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성향을 타고났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이기적인 측면이 강함과 동시에 더불어 살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동물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류는 지구상에서 가장 협력을 잘 하는 동물임에 틀림없다. 2011년 3월 미국 수리생물학자인 마틴 노왁이 이타주의 이론을 총 정리한 저서를 출간하면서 수퍼 협력자(Super Cooperators)라고 제목을 붙일 만도 하다.

노왁은 월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7월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린 글에서 인간이 수퍼 협력자로 진화된 까닭은 평판(reputation)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인류는 완벽한 언어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며 가까운 이웃부터 지구 반대편의 낯선 사람들까지 서로 정보를 공유하므로 세평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듣기 위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물질적 보답도 기대하기 어려운 낯선 사람들에게 선뜻 기부금을 내고 헌혈도 한다는 것이다.
노왁은 평판을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 되돌려 받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1980년대에 일본 도요타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경쟁 업체보다 앞서간 이유 중의 하나가 납품업체를 공평하게 취급했다는 평판이 고객 사이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안철수처럼 사회를 위해 큰돈을 아낌없이 내놓은 기업가는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정녕 평판을 위해 그 많은 돈을 기꺼이 기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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