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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물꼬 트는 자에게 ‘금척’을 주리니

중앙선데이 2012.09.09 02:33 287호 11면 지면보기
지난번 백두옹의 직언은 신랄했다. 대선 후보들이 개혁 정치를 말하기 전, 그들 자신부터 호랑이처럼 말끔히 털갈이하라고 호령했었다. 백두옹인지 한라봉인지 참 대차다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전에 백두옹은 강권 교수와 함께 경주 이견대를 찾아가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참배한 적이 있다. 신문왕은 100년간 이어진 통일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는데 여기에 대학자 설총(薛聰)의 간언이 주효했다.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꽃을 의인화하여 신문왕을 경계한 설화 ‘화왕계(花王戒)’가 전한다.
꽃의 왕, 모란이 피어나자, 그 화왕을 뵈려고 갖가지 꽃들이 멀고 가까운 데서 다투어 왔다. 문득 붉은 얼굴에 옥같이 흰 치아를 지닌 한 가인이 곱게 단장하고 와서 읊조렸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⑧

“첩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하고 맑은 바람을 쏘이는 장미입니다.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때 베옷 입은 늙은 장부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와 아뢴다.
“저는 성 밖 큰길가에 사는 백두옹(白頭翁:할미꽃)이라 하옵니다.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왕께서도 그럴 뜻이 있으신지요?”
곁에 있던 어떤 이가 나섰다.

“두 사람이 왔는데 왕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가인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꼬?”
화왕은 장미와 백두옹을 두고서 고민에 빠졌다.
“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여겨 왔건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닙니다. 무릇 임금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이를 멀리하기 마련입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어찌하리오.”
백두옹이 탄식했다. 이에 화왕이 크게 깨우쳤다.“내가 잘못하였구나! 내가 잘못하였구나!”

한반도가 세상의 중심 되는 그 날은...
‘화왕계’에 등장하는 바로 그 백두옹이라면 매섭게 호통 쳐도 뭐랄 사람 없다. 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한강 둔치공원을 산책한다.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서늘한 가을이 묻어난다. 그 기세등등하던 폭염의 여름날도 바야흐로 꼬리를 드러냈다. 천기는 이렇게 삽시에 뒤바뀌는 법이다.흐르는 강물을 보며 역사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이 땅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혹은 지도자에 따라 꼭 그만큼의 성취를 하며 달려왔다. 따라서 섣불리 너무 큰 기대도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 어젯밤 늦게 강권 교수가 전화로 물어왔다.
“문명의 서진(西進) 현상에 따라 동아시아로 세력 전이가 일어나고 있고 한반도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온다면서요. 그날이 가까워 옴을 아는 걸까요? 국민은 혁명적 변
화를 바라고 있는데 왜 백두옹께서는 개혁만을 말씀하시는 거죠?”

-지금 대한민국이 혁 괘 상태라 해도 개혁의 시대인지, 혁명의 시대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네.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의 면면을 보면 그 속에 답이 있지. 시대적 요청은 혁명이지만 그 적임자가 없으면 개혁으로 만족해야 한다네. 개혁만 잘해도 훌륭한 지도자야. 아직 해방(解放)도 안 했으니 혁명은 멀어.
“해방된 지가 언젠데요?”

-1945년 8·15 해방을 말하는가? 아쉽게도 그건 미완의 해방일세.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일본·미국과 대등한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한 해방이야. 다음 대통령은 마땅히 통일을 염두에 두고 모든 정책을 펼쳐야만 한다네. 제 6공화국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씨를 뿌린 공산권과의 북방 외교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북한 끌어안기로 이어졌지. 그러다 MB 정부에 와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어. 그 5년 동안 남북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달았지. 남북통일 없이 우리 한반도가 인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선도할 수 없다네. 일찍이 초인은 노래했던가.

밤이구나. 샘솟는 샘물은 소리가 더욱 커지네. 내 영혼도 샘솟는 샘물 같아서. 밤이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노래 소리만 깨어 있네. 내 영혼도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 가시지 않은 목마름 같은, 가실 수 없는 목마름 같은 것이 내 속에 있어 말하고 싶어 하지. 사랑에 대한 갈구가 내 속에 있어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백두옹이시여, 그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해주세요.”

-사랑? 진영 논리에 갇힌 너희가 진정 사랑의 의미를 아느뇨? 집권하면 끼리끼리만 해먹을 속셈뿐인 너희가 아낌없이 줘야 비로소 다시 채워지는 사랑의 본질을 아느뇨? 혹시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가슴으로는 증오의 부름켜를 치떨고 있지 않더냐? 이웃을 원수로 여기고 분노의 화살을 당기고 있지는 않더냐? 들을지어다. 이 백두옹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로다. 이 나라 근·현대사의 아이콘이니 부디 나를 역사의 소리로 여기라. 누가 시대적 사명인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겠는가. 그에게 황금의 자, 금척(金尺)을 주리니. 용의 척목보다 더 보배로운 그 금척으로 남북을 재고 온 세상을 재고 마름질하여 새 시대를 열어라. 그것이 이른바 팍스 코리아나, 얼마나 가슴 떨리는 세상인가.

공자는 진리, 예수는 사랑의 화살 쏘다
그쯤에서 강권 교수는 만나기를 청했다. 백두옹은 사직공원 옆 활터 황학정에서 보자고 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백두옹이 오랫동안 활시위를 당겨온 곳이었다. 한강변 산책에서 돌아온 백두옹은 아침을 먹고 늘 해오던 것처럼 독서하고 명상했다.
약속한 시간에 활터에 다다르자 활터를 관리하는 사두(射頭)가 깜짝 반가워하며 백두옹을 맞았다.
“어르신, 어인 걸음이십니까? 깜박 잊고 있었는데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백두옹은 막 도착한 강 교수를 사두에게 소개했다.
“자네 활 좀 잠깐 빌리세.”
“활을 쏘기에는 힘이 부치실 텐데요.”
사두가 늙어 꼬부라진 백두옹을 생각해서 주저했다.
“걱정 말고 갖다 주게.”
사두가 내어주는 활을 들고 백두옹과 강 교수는 정자 앞에 섰다. 뒤따라온 사두는 백두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 세 개의 과녁이 보였다. 백두옹은 깍지도 끼지 않고서 활시위에 활을 먹였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겨눴다.
“정말 쏘시려고요?”

“그 사람 참! 천하의 백두옹이 불과 이백 보 앞에 놓인 저 과녁을 맞히고자 여기 온 줄 아는가? 주역에 날개를 달았던 공자는 그 혼란스럽던 춘추시대에 세상을 향해 진리의 활을 쏘았네. 그때는 모두가 비웃었지만 성인이 쏜 화살은 그 후로 자그마치 2500년을 날아서 지금도 우리 가슴에 꽂히고 있지. 중국은 공자 다시 보기를 하고 있고 세계의 지성들이 '논어' 읽기에 빠졌네.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사랑의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 또한 2000년을 날아오고 있질 않은가. 강 교수! 모름지기 대통령이라면 100년 앞은 내다보며 정책을 써야지 않겠나? 고작 임기 5년의 성과에 안달해서야 어찌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겨우 밥숟갈 뜨게 됐다지만 지금 이 나라를 어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동의 가치도 지향점도 없이 제각각 흩어져서 돈벌이에만 눈먼 형국 아닌가! 그 사이 사람의 도리가 땅에 떨어져버리고 있다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도 문제네. 창피하지도 않은가!”
백두옹이 핏대를 세웠다. 강 교수는 다가가 그만 활을 내려놓게끔 했다. 강 교수는 보았다. 주름 깊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백두옹의 눈물을.

통일 한국이 열강과 대등해져야 참 해방
“어르신, 몸 상하시겠어요.”
“젊은 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 궁사들은 활터의 과녁을 일장기로 바꿨다네. 저기 한 가지 동(同) 자 과녁 안의 홍심(紅心)이 그거라네. 저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려 넣었지. 본래는 맹수의 머리 그림이었거든. 오늘날 이 나라의 분단은 일본에 나라 빼앗긴 데서 연유하네. 어젯밤 전화로 말했지만 진짜 해방은 남북통일 후 열강과 대등해질 때일세. 애오라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건만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니 내 어찌 눈물을 아끼겠는가.”
“맞습니다. 사명감이 너무들 없어요.”
강 교수는 백두옹을 부축하며 마루에 앉혔다. 언론매체에는 폭로 기사가 넘쳐났다. 박근혜 캠프의 공보위원이 뇌물과 여자 문제를 들어 안철수의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자넨 대통령 후보들 믿을 만한가?”

“5년마다 반복되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입니다. 솔직히 전 누구도 못 믿겠습니다. 국민들의 집단지성도 회의적이고요.”
“큰일 났군. 믿음을 주지 못하면 개혁 정치가 불가능해. 나는 그래도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같은 후보들의 심성을 믿으려네. 그간 정치인들이 곧잘 마음을 비웠다고들 했지만 알고 보면 재물과 권력욕으로 꽉 채워져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 어느 때보다 심성이 바른 후보들 아닌가. 믿음을 뜻하는 중부(中孚:
) 괘는 중심이 비어 있는 배의 형상이야. 배는 속이 비어야 물에 잘 뜨고 사람 마음은 속이 비어야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법이지. 믿을 부(孚) 자는 손톱 조(爪)와 아들 자(子)의 합자야. 새는 온 정성을 다해 발로 알을 굴려서 새끼를 까거든. 그래서 어미와 새끼 사이에 돈독한 믿음이 생기는 거야. 신급돈어(信及豚魚)라고 했어. 미련한 돼지나 하잘것없는 물고기에까지도 그 믿음이 미쳐야 큰일이 이뤄지는 거야. 후보들 그런 자세로 국민과 소통해야 해.”
“그런데 통일의 물꼬를 트는 대통령에게 주시겠다는 황금의 자가 뭐죠?”
강 교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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