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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소녀 납치후 강간 자백한 남자가 무죄?

중앙일보 2012.09.08 00:59 종합 31면 지면보기
범죄 용의자를 연행하는 미국 경찰의 모습이다. 1963년 연방대법원은 범죄 피의자인 미란다의 손을 들어주면서 “구속 심문 과정에서 강압적 분위기를 최소화 할 보호장치가 없었다면 피의자로부터 획득한 어떠한 진술도 피의자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사진 현암사]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L 레너드 케스터·사이먼 정 지음, 현암사

440쪽, 1만8000원




18세 소녀를 납치해 강간했다고 자백한 사람이 처벌을 피해갈 수 있을까. 1963년 미국 최고 법원인 연방대법원은 강간죄 등으로 1·2심에서 유죄를 받은 에르네스토 미란다의 손을 들어준다.



 1·2심이 뒤집힌 것은 70세가 넘은 국선변호사 알빈 무어의 창의적인 변론 때문이었다. 경찰이 미란다를 구속할 당시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라고 알려주지 않아 모든 자백은 무효라고 반박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동안 미국사회에서 종종 무시됐던 피의자의 인권 문제를 촉발시켰다. 우리가 수사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미란다의 원칙’은 여기서 비롯됐다.



 제목처럼 미국을 발칵 뒤집고 사회 흐름을 바꿔 놓은 판결 31개를 소개한 책이다. 연방대법원이 설립된 1789년부터 최근까지 남북전쟁, 대공황과 뉴딜정책, 워터게이트 등 미국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내려졌던 판결을 골라냈다. 낙태·사형제도·안락사·성희롱·음란물 등 현대 사회의 주요 쟁점도 추렸다. 잇따르는 흉악 범죄, 삼성과 애플의 법정 대결 등 재판과 판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터라 더욱 시의성 있게 다가온다.



 ◆판결문은 사회 돋보기=책의 장점은 대법관들이 작성한 판결문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 만 단어로 쓰인 판결 원문에서 핵심적인 구절을 찾아 700~800 단어로 요약했다. 짧은 것은 원문 그대로 실었다.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병폐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시대적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민주당 도청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자. 연방대법원은 통치자의 특권을 주장하며 녹음 테이프 제출 명령을 무시하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철퇴를 내린다. 판결문엔 “권력분립 원칙이나 대통령의 기밀 유지 권한이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으로 대통령의 면책 특권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이는 대통령 위에 법이 없다는,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법원의 견제를 천명한 것이었다.



 ◆위대한 반대자들=각종 이해가 얽히고 생각이 엇갈리는 재판. 다수결 판결이 원칙이지만 반대의견(소수의견)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가 변하듯 소수의견도 미래 세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90년 보이스카우트 단체가 부단장인 제임스 데일이 동성애자라며 회원 자격을 박탈한 사건이 그런 예다. 연방대법원은 5대 4로 보이스카우트의 편을 들어주는데, 이에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규정은 타인에 대한 편견의 산물이며 여기에 헌법적 보호장치를 만들어줄 수는 없다”고 반대의견을 썼다. 실제로 21세기에 들어와 동성애자 차별 철폐는 많은 진전을 이룬다. 스티븐스 대법관의 반대의견이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판결문보다도 더 논리적이고 호소력 있는 반대의견을 발표한 대법관에게 ‘위대한 반대자들(great dissenter)’이란 칭호를 붙여준다고 하니, 소수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이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판결 비하인드 스토리는 보너스다. 판결문이 다소 딱딱한 문체라면, 판결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재판 당사자 이후 행적을 적은 ‘에필로그’는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서두에 썼던 미란다는 어떻게 됐을까. 대법원의 판결에 반발한 검찰은 미란다의 자백에 근거하지 않고 증인들의 증언과 기타 증거물에 의거해 미란다를 다시 재판에 회부한다.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내고 미란다는 30년 형을 선고받는다. 가석방된 그는 술집에서 한 취객과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 칼에 찔려 살해된다. 피의자 인권 보호에 한 획을 그은 주인공의 비참한 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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