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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마는 ‘제비’지만 뛰는 건 싫어해 … 애견 바비와 동네 산책

중앙일보 2012.09.08 00:24 종합 25면 지면보기
프로기사 조훈현(59) 9단은 두말이 필요 없는 한국 바둑계의 신화입니다. 세계 프로기사 가운데 가장 많은 우승컵을 차지했고(타이틀 획득 158회), 공식 대회에서 바둑을 이긴 횟수도 가장 많습니다(통산전적 1874승 9무 792패). 1989년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던 응씨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해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그 후 다른 세계바둑대회에서도 한 번씩 돌아가며 우승해 최초로 ‘세계 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국내 프로 바둑대회의 우승컵을 싹쓸이한 것도 세 번이나 됩니다(전관왕 1980년, 82년, 86년).


[나의 아름다운 주말] ‘입단 50년’ 여유 즐기는 조훈현

‘기록 제조기’ 조 9단에게 올해는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초등학생이던 9살에 프로기사가 된 지 올해로 입단 50년을 맞았습니다. 고향인 전남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와 62년 10월 한국기원의 프로기사 입단대회를 통과했습니다. 한 해 두 명밖에 뽑지 않기 때문에 프로기사 입단이 사법고시 통과보다 어렵다는 말을 듣던 시절입니다. 그가 세운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은 50년 동안 한 번도 깨지지 않았고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습니다.



 소년의 새까만 까까머리는 어느덧 백발로 변했습니다. 바둑판 밖에서 만난 조 9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였습니다. 그의 주말은 어찌 보면 심심합니다. 승부의 최전선에서 한발 물러나 느긋하게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빈 공간을 굳이 채우려 하지 않고 여백의 미학을 보여주는 한 폭의 수묵화를 떠오르게 합니다.



어릴 때부터 개 좋아해 가족처럼 챙겨



프로기사 조훈현 9단의 바둑 인생 50년에서 애견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조 9단이 서울 평창동 자택 마당에서 애견 ‘바비’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 아프간하운드 종인 바비는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이 특징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금 사는 곳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택가다. 이곳에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91년 같이 살던 제자 창호(이창호 9단)가 독립해 나간 뒤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평창동으로 옮겨왔다. 북한산 남쪽 자락에 있는 평창동은 대체로 지대가 높지만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 서서 고개를 들면 북한산 형제봉이 훤히 올려다 보인다. 서울에서 이만큼 전망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말이면 오전 6시 무렵 일어난다. 급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요즘엔 날이 일찍 밝아온다. 저절로 눈이 떠진다. 일어서면 신문부터 찾는다. 언제부턴가 눈이 나빠져 신문을 꼼꼼히 읽지는 못한다. 제목을 쭉 훑으며 관심 가는 기사를 찾아 보는 정도다. 신문은 내용이 풍부하면서 깊이가 있어 좋다. 아침을 먹을 때까진 별다른 할 일이 없다. TV 아침 드라마를 보거나 인터넷으로 간밤에 화제가 됐던 뉴스를 살펴 본다.



 아침을 먹고 나면 동네 산책을 나간다. 정해진 코스는 없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따라 기분 내키는 대로 걷는다.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도 있어 걷는 즐거움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바비’라는 이름의 애견도 자주 끌고 나간다. 6년 전인가 잘 아는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에게서 생후 3개월 된 강아지를 받아 왔다. 아프간하운드라는 종인데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이고 영국에서 개량했다고 한다.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이 철렁철렁 날리는 ‘귀족 개’다. 매일 털을 빗겨줘야 해서 사람보다 손이 더 간다. 여름엔 더울까 봐 털을 많이 깎아줬는데도 여전히 복슬복슬하다. 개를 산책시키는 것도, 개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도 주로 내 몫이다.



 개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10살 때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가서 사귄 유일한 친구가 ‘벤케이’라는 개였다. 당시 세고에 겐사쿠 9단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힘들고 외로운 시절이었다. 어느 날 스승이 강아지를 한 마리 안고 들어오셨다. 진돗개를 닮은 일본의 명견 아키다 종이었다. 그 후 9년간 벤케이와 동고동락하며 깊은 정이 들었다. 19살이 되자 병역 문제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귀국하고 몇 달 뒤 벤케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비실거리더니 끝내 숨을 거뒀다는 거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다.



북한산 흙길 밟으면 기분 상쾌해져



 주말 취미라면 등산과 골프다. 등산은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을 자주 찾는다. 형제봉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까지 걸어서 15분쯤 걸린다. 내게 가장 힘든 구간은 정상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경사로가 아니다. 오히려 집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길이다. 촌놈이라 그런지 딱딱한 아스팔트보다 폭신한 흙길이 훨씬 편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내에게 부탁을 한다. 등산로 입구까지만 차로 태워 달라고. 차로는 3~4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산에 오르며 흙길을 밟으면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형제봉을 넘어 능선을 타면 일선사라는 절과 보현봉이 나온다. 현재 보현봉은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올라가는 길이 막혀 있다. 일선사 밑으로 능선을 타고 조금 더 가다 보면 큰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주로 비봉 능선을 타고 가다 이북5도청이 있는 구기동 쪽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매번 같은 길로만 다니면 재미가 없다. 정릉 쪽으로 나올 때도 있고, 우이동이나 송추까지 갈 때도 있다. 진한 초록색으로 물이 오른 나무 사이로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느낌이다.



 바둑에선 ‘제비’란 별명처럼 발빠른 행보로 유명했지만 사실 나는 천성적으로 뛰는 것을 싫어한다. 조깅이나 마라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테니스도 경기 내내 계속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골프는 걷는 운동이어서 몸에 맞는 편이다. 만일 골프도 뛰는 운동이었다면 처음부터 포기했을 거다. 골프채를 잡은 지는 6년쯤 됐다. 예전엔 이틀에 한 번꼴로 바둑을 둬야 해서 골프를 배울 틈이 없었다. 그런데 승부의 세계는 냉혹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니까 갑자기 시간이 남아돌았다. 토너먼트 대회는 한 번 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내가 먼저 골프를 배운 것도 자극이 됐다. 아내가 골프장에 나가는 날이면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집에서 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1주일만 제대로 배우면 골프장에 나갈 수 있다고 권했다. 그런데 웬걸, 코치를 찾아갔더니 “두 달은 걸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돌아서 나오려고 했다. 그랬더니 코치가 당황하며 “한 달 만에 나가게 해주겠다”고 하더라.



 지금은 평균 90타 정도 친다. 딱 그 정도가 알맞다. 이 나이에 최고수가 되기는 어차피 무리고, 100타 이상 치면 같이 나간 상대가 힘들고. 내 스타일은 대충대충 치는 편이다. 드라이버 비거리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그린 근처의 숏게임이 약해 속상할 때가 많다. 돈이 걸리면 신중해지지만 그럴수록 더 못 치기도 한다. 농심그룹에서 운영하는 경기도 포천의 일동레이크 골프장에 자주 간다. ‘농심 신라면배’ 바둑대회로 바둑계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코스 난이도는 높은 편이지만 관리가 잘 돼 있어 좋다.



저녁엔 인터넷 바둑 최고수와 한판



 주말 저녁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먹는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되는 건 주말뿐이다. 아들과 두 딸이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평소엔 얼굴 볼 틈이 없다. 모두 직장일과 사회생활에 바빠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나 들어온다. 나도 젊을 땐 그랬다. 자정에라도 지방에서 친구가 놀러 오라고 부르면 기꺼이 집을 나섰다. 이젠 힘들어서 친구들이 불러도 “다음에 보자”고 할 때가 많다.



 간혹 외식도 하지만 대부분 집에서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음식을 먹는다. 요새는 은퇴하고 집에서 하루 세 끼를 먹으면 아내에게 구박을 받는다던데, 나는 한 번도 구박당한 적이 없다. 휴대전화가 없는 남편 대신 전화도 받아주랴, 운전할 줄 모르는 남편을 위해 운전도 하랴, 못 하나 못 박는 남편 대신 집안일도 챙기랴, 평생 남편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 아내가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저녁을 먹고 시간이 남으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바둑을 즐긴다. 원체 센 사람이 많아 방심은 금물이다. 인터넷 바둑의 최고수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기사라고 봐야 한다. 얼굴과 이름은 확실히 몰라도 느낌으로 안다.



 어느덧 프로기사 입단 50년이 됐다. 내년이면 환갑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온 세월이다. 89년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대회(우승상금 40만 달러)에서 우승했던 영광의 순간이 바로 엊그제 같다. 정상의 승부사 자리에선 이미 오래전에 물러났다. 하지만 바둑돌을 쥘 수 있을 때까진 계속 바둑을 둘 것이다. 바둑엔 정년이 없다. 프로기사로서, 한국기원 이사로서 한국 바둑의 발전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



 바둑이 문화예술에서 스포츠로 전환한 게 불과 3~4년 전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선 빠졌다. 올림픽은 아직 먼 얘기지만 아시안게임에서라도 바둑이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동안 바둑팬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 이젠 그분들께 무엇을 돌려드릴까 고민하며 살아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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