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송파에 반해 송파 그린 지 7년, 4B연필이 짧아질수록 정이 묻어나와요

중앙일보 2012.09.06 03:14 2면
깔끔한 느낌의 화실에 들어서자 ‘연필 냄새’가 은은하게 진동한다. 입구 한쪽에는 화실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유리병이 50개 이상 진열돼 있다. 몽당연필로 가득 채워진 각각의 병 속에는 노력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석촌호수나 올림픽공원을 4B연필로 그리는 남자의 화실 풍경이다. 사진과는 또 다른 스케치의 매력에 푹 빠진 송파인을 소개한다.


송파人 이야기
서양화가 김용일

글=김록환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석촌호수를 배경으로 야외 스케치를 하고 있는 서양화가 김용일씨. 지금도 틈만 나면 석촌호수를 찾는다.


석촌호수에서 3분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모노그라프’라는 화실이 있다. 서양화가 김용일(43)씨의 화실이다. 회원 수만 8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일대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일반 주부에서부터 영화감독, 중소기업 사장들까지 김씨에게 풍경화·인물화를 배우러 찾아온다.



하지만 처음부터 화실이 번창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젊은 시절 입시미술학원 강사 일을 했던 김씨는 획일화된 입시 교육에 회의를 느꼈다. 그는 바로 강사를 그만두고 인터넷 공간에 인물화 카페를 만들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일반인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 같은 사람들을 위해 화실을 열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화실을 열 공간을 찾던 중, 송파구의 여유로움에 반했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녹지 공간이 잘 조성돼 있어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워 보였고, 교통편도 좋아서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김씨는 곧 어려움에 빠졌다. 친한 후배에게 500만원을 빌려 작은 화실을 어렵게 열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간혹 상담을 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조차 화실의 초라한 인테리어와 작은 규모를 보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수강 과목을 초등학생 위주로 바꾸자 한 명씩 회원이 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설치할 돈이 없어 화실에 물을 뿌리며 수업을 진행했다.



그 때 김씨는 ‘진정성’을 선택했다. 무작정 석촌호수로 야외스케치를 나가 이젤을 펴놓고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소 이색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하나 둘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김씨는 “모인 사람들을 모델로 인물 드로잉을 그려서 선물로 줬더니 굉장히 좋아했다”며 “그림 한 장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석촌호수 야외스케치 외에, 수업이 끝나면 새벽까지 전단지를 돌리고 블로그 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성인 회원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자 그는 미술지도 외에도 ‘인생 도우미’ 역할을 자처했다. 회원들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며 가족처럼 챙기는 김씨의 노력에 힘입어 화실은 번창했고, 2010년에는 확장이전까지 하게 됐다.



처음 이젤을 들고 석촌호수를 찾았을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 그는, 지금도 송파구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송파1동 주민센터에서 지역 주민을 위한 ‘연필인물화’ 강의를 2년간 했다. 지난해에는 한성백제미술대전에도 참여했다. 송파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재능기부 행사의 일환으로 ‘인물 드로잉 그려주기’ 봉사활동 역시 매년 하는 중이다.



“인물드로잉은 무척 매력적이다. 4B연필로 그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다양한 모습들이 묻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선이나 명암을 통해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감성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기계가 만들지만, 그림은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에는 이 같은 작업을 바탕으로 책까지 출간했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하는 인물스케치’라는 제목처럼, 공부가 아닌 행복을 위해 4B연필을 잡아보자는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또한 그는 집을 주제로 한 작업에도 푹 빠져 있다. 한옥이나 양옥과 같은 다양한 유형의 옛 집을 스케치하며 가족간의 정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김씨는 “집이 다양하게 발달하며 살기에는 편해졌지만 가족간의 대화가 단절되는 양상이 있다”며 “아름다운 옛 집들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통해 정을 되살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삶이 송파에 녹아있는 만큼 송파의 거리나 환경을 소재로 한 작업도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내년 가을쯤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개인전을 하는 것이 목표다. 많은 분들이 제 그림을 보고 행복을 느꼈으면 한다”고 웃어 보였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