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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제주 올레 살인 사건, 그 이후

중앙일보 2012.09.04 00:56 종합 38면 지면보기
이철호
논설위원
나주의 일곱 살 초등학생 A양은 범행 현장인 영산대교 밑 수풀에서 기어나와 20여m 떨어진 강변도로에서 발견됐다. 그날 새벽 제14호 태풍 덴빈이 나주를 휩쓸었다. 발견 당시 A양은 비에 흠뻑 젖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알몸으로 떨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잡은 이불은 끝내 놓지 않았다. “몹쓸 짓을 당하고 정신까지 잃었지만 혹시나 이불을 잃어버리면 엄마에게 야단맞을까 봐 그런 것”이라고 경찰은 설명했다. 병원에서 사흘간 밥도 못 먹고 물만 한 모금씩 마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A양에게 이불은 그렇게 소중했나 보다. 제기랄, 또 가슴이 아려온다.



 우리는 끔찍한 사건에 너무 빨리 흥분하다 너무 쉽게 식는다. 미안하지만, 나주 A양 사건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않을까 두렵다. 불행은 언제나 피해자의 운명으로 돌린 채…. “어떻게 여기서 더 살 수 있겠는가”라는 A양 아버지의 울부짖음대로 피해자 가족이 이사를 가고, 또 그렇게 이 사건은 기억 속에 묻힐지 모른다. 7월에 일어난 제주 올레길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11일 만에 범인이 잡히면서 사회적 관심은 사그라지고, 피해자는 서울 근교 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묻히면서 끝났다. 이제 슬픔의 흔적은 피해자 가족의 블로그에만 남아 있다. “모든 게 이 못난 아빠의 잘못이라 생각하며 눈물 짓고 있다. … 나 죽어 다시 만나면 그때는 돌봐주고 아끼고 사랑하는 딸과 아빠로 만나자꾸나.”



 엽기 사건을 맞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범인과 피해자에게만 향한다. 겉으로 보면 올레길 사건도 멀쩡하게 복구됐다. 제주도는 관광 성수기인 8월에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호황을 누렸다. 오히려 두 차례 태풍 때문에 항공편이 끊어질까 조바심을 쳤을 정도다. 제주 콜센터에 들어오는 관광 문의도 별로 흔들리는 조짐이 없고, 숙박업소와 식당은 여전히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다. 올레 사무국은 “다행히 올레 다니는 분은 꾸준히 들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눈에 안 띄는 간접 피해로 신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인구 1200명의 제주 시흥리가 그렇다. 범행 현장인 올레1코스가 폐쇄되면서 말미오름 부근의 게스트하우스와 식당은 죽을 맛이다. “같은 마을 사람이 일을 저질러 함부로 억울하다 말도 못 하고…”라며 냉가슴을 앓는다. 원래 1코스는 풍광이 뛰어난 7코스와 함께 올레의 상징이었다. 맨 처음 뚫린 원조라는 자부심에다 말미오름에서 촬영한 ‘1박2일’ TV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면서 대박이 났다.



 올레꾼들이 아침에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하면 점심 무렵 닿는 데가 ‘시흥해녀의 집’이다. 마을 어촌계가 공동 운영하는 이 식당의 ‘조개죽’은 한때 조개가 달려 못 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다. 7곳의 게스트하우스도 많은 돈을 들여 새 단장을 했지만 올레꾼 얼굴을 본 지 오래다. 전 이장인 강병희씨는 “우리 마을은 올레길 덕분에 매년 7억~8억원의 수입을 올렸는데…”라며 한숨을 쉰다. 요즘 올레길에는 여성 혼자 호젓하게 걷던 풍경은 사라졌다. 대개 오전 9시에 함께 모여 출발한다. 아무리 대로변에 CCTV를 세우고 자율방범대를 투입해도 한번 무너진 안전 신화는 치유하기 어렵다.



 엽기 범죄의 파장이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다. 법원도 시야를 넓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후유증을 앓는지 판결을 내릴 때 감안했으면 한다. 대통령과 여당 대선 후보가 100일 동안 특별안전기간으로 선포한다고 마음 놓고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제 누가 당할지 모를 불안 속에 어떻게 국격(國格)이나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찾겠는가. 전문가들은 툭 하면 범죄 원인을 우리 사회문제로 돌린다. 똑같은 논리라면 왜 가난과 양극화에 찌들었던 1960년대에 우리 사회가 멸종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인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불심검문은 물론 끔찍한 반(反)사회적 흉악범을 영원히 격리시키는 방안을 따져볼 때가 됐다. 한국은 15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오늘 따라 별로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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