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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추락하는 일본, 날개가 없다

중앙일보 2012.09.04 00:53 종합 39면 지면보기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980년대 중반 유학시절, 동아시아 관련 강의는 인기 절정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신흥산업국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도 그랬거니와, 태평양시대의 편대장 격인 일본 때문이었다. 강의조교였던 필자는 담당 학생들과의 한 시간 토론을 위해 밤을 새워야 했다. 30분 정도의 요약 강의에서 허점을 보였다간 오만한 저 미국의 수재들에게 망신당하기 일쑤였다. 긴장된 대본 암송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갈 즈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한국은 어디에 있나요?” 오잉? 천연덕스러운 뜻밖의 질문에 대본은 흐트러졌다. 요즘 말로 ‘멍 때리는’ 한국인 조교를 미국 수재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들에게 제국 일본은 있었으나 식민지 한국은 없었다.



 2년 전 여름, 외국 대학생들과 같은 주제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사뭇 바뀐 동아시아 판도를 차분히 설명하는데 유럽에서 온 듯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한국이 일본보다 큰 나라죠?” 오잉? 그거 정말 듣고 싶은 얘기였다. 사실대로 답은 했지만 그 학생이 무한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어쨌든 30여 년 만에 세계인의 인식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증거였다. 세계 주요 공항과 도시마다 삼성·LG 광고가 번쩍이고, 김연아의 빙무가 세계를 열광시킨 덕분이었다. 유엔 사무총장, 세계은행 총재가 모두 한국인이고, 미국 일류대학에 한국 학생이 매년 이삼백 명씩 입학하고, 세계 구석구석을 한국인들이 누비고 있으니 그런 인식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터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뇌리에는 ‘일본은 대국(大國)’이란 불변의 명제가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영토 분쟁에 나선 최근 일본의 정치권과 언론의 행보에는 대국다운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본 명문대학과 십여 년을 교류한 경험은 조금 알쏭달쏭하다. 우리 학생들은 득의만만하게 이렇게 푸념한다. “말이 안 통해요.” 연구 주제가 너무 잘기 때문이란다. ‘편의점 알바 근로환경’ ‘자원봉사자의 구성’ ‘청년 취미생활의 실태’ 등에 집착하는 일본 학생들에게 국가, 민주주의, 사회운동, 변혁, 성평등같이 한국 학생들이 열 올리는 거대담론이 통할 리 없다. 교수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처음 온 신임교수에게 인사 겸 전공을 물어봤다. 그 친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렇게 답했다. “섹스 라이프.” 오잉, 성생활이라고? 하기야 사적 비밀과 내면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라는 질문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술 한잔으로 꼴깍 넘겼다.



 일본은 선진국임에 틀림없다. 저 단편적 일화가 일본의 학문수준을 폄하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작고 튼실한 소립자가 서로 엮여 촘촘히 짜인 사회가 일본이다. 일본의 힘은 거기서 나왔다. 자기헌신적, 자기완성적 소인(小人)들이 뭉치면 대인(大人)이 된다는 것을 터득한 일본인들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최상의 상징체계를 창안했다. 천황제가 그것이다. 천황제는 소립자들의 규합을 일사불란한 우주로 만드는 신화이자 종교다. 그래서 덴노헤이까를 위해 대동아전쟁을 일으켰고, 덴노헤이까를 외치며 산화했다. 종전 후 전범을 면한 덴노헤이까 상징체계는 일본의 경제 기적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경제적 성공은 위기의식을 갉아먹었고, 위기의식의 실종은 그 상징체계를 부식시켰다.



 1989년 1월 히로히토 천황이 서거할 당시 미국 사회학자 노마 필드는 ‘절망의 통곡’과 ‘희망의 서곡’이 교차하는 일본의 이중적 집단심을 목격했다(박이엽 역,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전자는 소인(小人)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후자는 원래의 자리, 진정한 소인에서 시작하자는 외침이었다. 양자 모두 대국환상(大國幻想)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원래 소국(小國)이었다! 천황이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정점에 서자 대국환상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이 바다를 넘어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질주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토점령과 징병, 징용, 군위안부 강제동원은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우리에게 뼈아픈 역사는 그들에겐 환상이었다.



 그래서 5000만 한국인의 염장을 지르는 적반하장 격 질문이 가능하다. ‘증거를 대봐라?’ 증거를 대라는 것은 소인배의 어법이다. 대인(大人)이라면 스스로 한 짓을 부끄러워한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 36년간 강토를 유린했다면, 엎드려 있는 게 대국(大國)의 정도(正道)다. 8월 29일, 102년 전 한국을 불법 합병한 그날, 일본 의회는 바위섬 독도를 떼 가려고 일장기 앞에서 전원 기립했다. 시들어가는 대국환상 속에서 감행한 소국(小國)의 편벽한 단결이었다.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역사를 냉혹하게 바라볼 집단 지성이 날개라면, 대국에서 소국으로 추락하는 일본은 날개가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국은 대국적(大國的)인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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