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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女화가 "250원에…" 日부부에 간청

중앙일보 2012.08.31 01:33 종합 12면 지면보기
나혜석이 쓴 편지와 함께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사진.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가 편지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왼쪽부터 나혜석,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 1927년 6월 편지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나혜석학회]


나혜석의 유화 ‘정원’.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염치없는 청이어서 죄송합니다만 댁이 사 주시면 행복하겠습니다. 가격은 300원이 되어 있지만 250원쯤에도 괜찮습니다.”

“이 그림 250원에 사 주시면 행복하겠습니다”
비운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친필 편지·엽서 6통 첫 공개
“유럽 색다른 풍속 재밌어요”
남편과 행복했던 세계일주
이혼 후 궁핍한 삶 고스란히



 1931년 11월 29일, 서른다섯의 나혜석은 일본인 지인에게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일본 제국미술대전에 입선한 ‘정원(庭園)’을 팔기 위해서였다. 공무원 월급이 50원이 채 안 되던 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친필 편지·엽서 6통과 관련 사진이 발굴됐다. 그림이나 책에 서명한 외에 그의 육필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1927∼34년 일본의 실업가로 조선 여학생들을 후원 했던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에게 보낸 일본어 서한이다. 일본 구마모토대 강사 우라카와 도쿠에(여성학)가 오사카 모모야마학원에서 발견한 것을 초당대 서정자(국문학) 명예교수가 입수했다. 서 교수는 이 자료를 9월 1일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발족하는 나혜석학회 창립 총회에서 발표한다.



초당대 서정자 명예교수가 공개한 나혜석의 육필 편지. [사진 우라카와 도쿠에]
 나혜석은 근대기의 신데렐라였다. 유년기부터 최초이자 1등 인생을 살았다. 용인 군수를 지낸 나기정의 둘째 딸로 태어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한 뒤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한국 최초다. 스물다섯에 서울에서 한국인 화가로는 최초의 유화 개인전도 열었다. 여성의 사랑과 삶, 사회 활동을 존중해 달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혼 조건을 관철시키며 변호사이자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남편의 유럽 시찰을 따라 해외여행을 하며 여행기와 그림을 잡지에 연재하기도 한 당대의 유명인사였다. 이러한 그의 빛났던 시절은 1928년 7월의 엽서에도 나타나 있다. “저는 하기 휴가를 이용해서 영국 런던에 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풍속·인정이 차이가 나는 것이 볼 만하고 재미있습니다.”



 전통적 여성관에 정면 도전했던 그는 1931년 이혼한 뒤 점차 사회에서 외면받았다. 52세 때 서울의 한 무연고자 병실에서 신분을 함구한 채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그림을 팔려는 편지를 쓴 건 이혼한 해 말이었다. “ 과도기에 태어나서 예술을 위해서 살려고 했으나 시어머니, 남편의 몰이해 때문에 당분간 별거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다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사정 설명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나혜석의 영락이 시작된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인생의 절정이기도 했다. 제국미술대전 입선작이 도쿄를 거쳐 교토로 순회전을 다니던 때였다. 나혜석은 야나기하라 부부에게 바로 이 그림을 팔려고 시도한다.



 “‘정원’은 파리 체재 중에 그린 것이어서 자신 있는 회심작입니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 만약 어르신 댁이 안 되면 따로 사들여 주실 분을 소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청한다. 현재 ‘정원’의 소재는 알 수 없다. 전람회 도록의 흑백사진으로만 그림의 완성도를 짐작할 뿐이다.



 가천대 윤범모(미술학) 교수는 “나혜석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게 없다. 진품으로 확인된 작품도 10여 점뿐이다. 이번에 발견된 친필 편지는 나혜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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