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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우리 역사 ② 송파구 가락동 비석거리공원

중앙일보 2012.08.30 03:13 2면


한강을 가로질러 서울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잠실대교를 지나 성남방향으로 약 4㎞ 정도 달리다 보면 가락농수산물시장이 나온다. 그 건너편에는 빌딩 2층 만한 높이의 언덕이 있다. 입구에는 ‘비석거리공원’이라 써진 커다란 선돌이 있다. 옛날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던 이곳은 나그네의 쉼터이기도 했다.

옛 한양 가던 나그네 쉼터에 옹기종기 모인 송덕비 11개



 가락동 비석거리공원은 1988년 새롭게 꾸며졌다. 당시까지 2000여 ㎡ 넓이에 조선시대 비석 10여 개가 잡초와 쓰레기 속에 방치돼 있었다. 송파구는 2300만원을 들여 주민 휴식공간으로 꾸미고 비석에 받침대를 세워 원상 복구한 뒤 안내판을 세웠다. 6년 뒤 서울시는 ‘정도 6백 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고증을 거쳐 ‘동네 명소 600곳’을 선정했는데, 이 공원이 600개 안에 들게 됐다. 원래는 비석이 16개였는데 5개는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비석은 애민청덕선정비, 애민선정비, 청덕선정비 등 모두 6가지다. 맑고 깨끗한 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청렴한 행정을 펼친 지방관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다. 비석 전면에는 관리들의 이름과 직함이 적혀있다. 직함을 살펴보면 목사(牧使·정3품, 관찰사 밑의 외직문관) 2명, 부윤(府尹·종2품, 지금의 시장) 7명, 성주(城主, 성의 우두머리) 2명 등이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광주였던 이곳은 한양을 방어하는 도시였다. 국왕이나 집권세력이 중요시하던 지역이라 최고관리 임명에 신중을 기한 곳이기도 하다.



 11명의 이름은 이시방, 허정, 정치화, 신준, 김여옥, 홍전, 이석달, 심지명, 이진, 황호, 기진흥이다. 주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때 국가에 공을 세운 후 광주부(조선시대에 남한산성과 광주지방을 관리하던 관청)에서 수장(首長)을 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이시방은 선조의 서손자인 능양군(훗날 인조)을 임금으로 옹립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의 최대 공로자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정말 앞일을 알 수 없는가 보다. 폐위된 광해군은 19년 동안 이곳 저곳으로 유배 다니다가 마지막에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제주목사가 이시방이었다. 이시방은 부임한 지 1년 후 광해군의 부고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조선왕조실록은 “그가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禮)로 염빈(斂殯)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시방은 자기가 앞장서서 폐위시킨 전(前)왕의 죽음에 직접 염을 하고 장례까지 치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비석을 세우는 것과 관련해 여러 가지 논란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정비(善政碑)는 그 고을 원이 교체된 후 세우는 것인데 그 원이 재임 중인데도 절벽을 깎아 칭송하는 글을 새기는 일도 있었다. 이에 정조는 비석을 세우는 일을 금해야 할 일 중에 하나로 꼽았다.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광주부 관아는 남한산성 안에 있었을 텐데 그들의 비석이 왜 이 가락동 주변에 있게 된 것일까. 이곳의 비석들이 세워진 시기는 인조 9년(1631)부터 효종 2년(1651)사이다. 왜 이 시기의 사람 것만 남아 있는지, 없어진 5개의 비석은 어느 시대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이 비석들은 380년간 이곳에 서 있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뒤 시원스런 매미소리를 들으며 잠시 격동의 시대에 이곳을 다스렸던 주인공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정애숙(64·송파문화해설사회 회장)씨는 2009년 송파문화원 박물관대학 수료 후 심화과정을 거쳐 송파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도 전시해설사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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