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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귀 얇고 줏대 없는 사람들’의 시대

중앙일보 2012.08.29 00:40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정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최근 대한민국 유권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또는 흐뭇하게 만든 칭찬 릴레이가 벌어졌다. 박근혜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선출 다음날 과거 자신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그의 정적(政敵) 문재인은 이를 두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안철수는 잠재적인 정적 박과 문을 향해 “이런 게 국민이 원하는 정치이며, 두 분 다 쉽지 않지만 필요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들 3인은 대선후보 중 상대적으로 진실함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국민들이 박근혜의 행동과 문재인·안철수의 발언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배경에는 정적을 존중하거나 칭찬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정치문화 외에도 이들의 언행에 진심이 담겨 있을 거라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3인이 현재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선의(善意)는 제쳐두고, 정치공학적 셈법을 동원해 삐딱하게 쳐다본다면 이들의 언행에 또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인다. 중간층, 중도층, 부동층 무엇으로 불리던 간에 특정 후보나 정파에 확신에 찬 지지를 확정 짓지 못한 유권자들을 향해 수준 높은 구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18대 대통령 선거는 주요 후보들이 일제히 중간층을 선거 캠페인의 핵심 타깃으로 삼고, 여기서 승부를 내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박근혜가 5년 전의 ‘줄푸세’ 대신 경제민주화를 맨 앞에 내세운 것이나, 문재인이 정치판에 뛰어들며 “생각이 다른 쪽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감이 진보의 문제”라고 말한 것은 전통 지지층 대신 중간층을 겨냥해 영점조준(零點照準)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안철수는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말로 진보-보수의 이분법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5년 전 이명박-정동영, 10년 전 노무현-이회창의 격한 이념적 대결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적지 않은 차이다. 3인의 경제·통일 정책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꽤 있다.



 중간층은 이념지향적, 정파적 성향과 거리가 멀다. 거대 담론을 논할 만큼 박식하지도 않고, 선거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지도 않는다. 대신 인물이나 이슈에 관심을 보인다. 진정성이나 감동에 예민하다. 후보에 대한 평가도 “마음에 든다” “리더답다” “지금 이 시기에 적합하다” 등 무겁지 않고 상식적이다. 중간층은 쉽게 말해 귀가 얇고 줏대가 없는 사람들이다. 변덕이 심한 기회주의자들이다. 후보들이 중간층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려면 지지층보다 2배 이상의 정성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귀 얇고 줏대 없는 사람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왔다는 건 나쁘지 않다. 이 참에 과거 주로 야당을 지지했던 사람이 박근혜를 눈여겨보고, ‘여당 체질’임을 고백하던 사람이 문재인·안철수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사생결단식 선거판이 그동안 우리 사회를 얼마나 그늘지게 했는가. 이번 대선만큼은 그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중간층의 힘으로 “○○○이 대통령 되면 나는 이민 간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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