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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나는 무모함을 연민한다2

중앙일보 2012.08.28 00:01 종합 32면 지면보기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그제 지리산 천왕봉(1915m)을 다녀왔다. ‘다녀왔다’는 표현이 어쩐지 건방져 보이긴 하지만 종주를 순례하듯이 해온 나로서는 그리 크게 과장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는 썩 내키지 않았다. 지난 금요일 새벽 4시, 짐을 꾸려 서울을 떠나는데 초대형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할 것이라는 우울한 뉴스가 귀를 때린다. 진주로 가는 길, 폭우에 생고생하는 고속버스 와이퍼가 불쌍하다. 막상 중산리 매표소에 도착하니 입산통제라는 빨간 공고문이 빗속에 젖어 있다. 또 무모한 고집을 부렸구나 하는 자괴감 속에 민박집을 골랐다.



 죽치고 앉아 입산통제가 풀리기만 기다리니 이건 완전히 죽은 아들 불알 만지기다.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 뒤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틀어놓은 TV의 태풍 뉴스가 엄청 겁준다. 게다가 케이블에서는 기후로 인한 재앙 영화 ‘투모로우’까지 등장해 기를 팍 죽인다. 무모하게 산행을 저지른 스스로에게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전날 밤 산에 간다고 일찍 파했던 저녁 자리가 아쉽고 또 쫓기는 시간 때문에 급하게 마셔댄 폭탄주에 속이 아리다.



 자정이 조금 지나자 창밖이 소란스럽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한 무리의 열혈 등산객들이다. 이어 반짝 입산통제가 풀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서둘러 일행을 깨워 산행에 나선다. 알려진 대로 중산리와 법계사를 경유해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는 최단 경로이긴 하지만 그런 만큼 경사가 가파르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지니 길은 미끄럽고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다. 다섯 시간 걸려 정상에 이르니 평소 그 많던 사람들은 간데없고 불과 십여 명이 덜덜 떨며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이른바 인증 샷이다.



 산에서 주고받은 얘기들은 많다. 졸업반인 제자는 취업 고민을 토로했고 나는 취직보다는 어디 아프리카에 한 일 년 봉사활동이 어떠냐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황당한 충고를 던졌다. 기왕이면 킬리만자로가 있는 탄자니아가 어떠냐고 얘기했더니 모두가 내년 여름에는 킬리만자로 등정에 나서자고 맞장구를 친다.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된 한 제자는 전직(轉職)을 고민해 왔으며 또 한 녀석은 지금하고 있는 벤처 사업에 대해 열기를 가지고 설명해 왔다.



 산은 변화무쌍하게 소낙비와 햇빛과 가랑비와 구름을 번갈아 가면서 선사했다. 천왕봉~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종주길은 통상 100리라고 한다. 실거리는 25㎞밖에 되지 않지만 벅찬 감동의 거리가 더해진 것이다. 고독한 보병처럼 걷기를 열두 시간, 세석에 도착한 오후, 모두가 기진맥진, 참담하다. 모두가 내 입만 바라본다. 나는 안다. 이쯤 해서 종주를 그만했으면 하는 게 그들의 눈빛이다. 관절에 조금씩 신호가 온다는 한 제자의 말에 고민은 깊어졌다. 믿음직한 청년인 그는 물리치료도 하고 무릎 보호대까지 준비해 왔지만 아마추어 등산가에게 지리산 종주가 어디 그리 녹록한가. 결국 향후 일정을 포기하고 늦은 밤 거림골을 통해 하산을 결정했다.



 하산길로 택한 거림골 일대는 이념 갈등의 쓰라린 비극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2000여 명에 이르는 빨치산들이 숨어 들어간 곳. 군경 토벌대에 쫓기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1953년 1월 이 계곡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12년간 선녀굴에 숨어있던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1963년 11월 생포됨으로써 남쪽 땅 빨치산의 역사는 끝났다. 무기징역을 살던 그녀는 85년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출소해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북송을 희망했지만 전향서가 빌미가 되어 거부당한 채 4년 뒤 인천의 한 요양소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랜턴에 의지해 내려오는 캄캄한 밤길, 골짜기에서 숨져간 수천 망자들의 이미지가 겹쳐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늘 그랬듯이 무모함을 무기 삼아 2박2일의 산행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지금도 진행 중인 좌우 갈등에 대해 생각해 본다. 광기 어린 이념 대결 속에 당시 숨져간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스무 시간 가까이 걸은 극심한 피로 속에 심야 고속에 몸을 실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말똥말똥해진다. 여름이 저만큼 떠나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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