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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문화예술은 환상의 마리아주

중앙선데이 2012.08.26 01:30 285호 22면 지면보기
미술 꿈나무로 선발된 초·중·고교 학생들이 작가로부터 입체 오브제 제판작업을 배우고 있다. 한성자동차가 주최한 ‘드림 그림’ 꿈나무 미술교육 사업이다. 
와인 애호가이다 보니 ‘마리아주(Mariage)’라는 프랑스 말을 심심찮게 쓰게 된다. 좋은 와인이 나오려면 포도밭과 물, 주변의 온도·습도 등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경우엔 특정 와인과 맞는 음식의 조합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말로는 ‘궁합’이라고나 할까. 의미가 확장돼 화합·동행·상생을 뜻할 때도 있다.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활동, 메세나(Mecenat) 운동 종사자로서 메세나를 표현하는 말로 ‘마리아주’만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정말로 기업과 문화예술은 훌륭한 동반자 관계다. 왜 그런지 길게 설명하기보다 메세나를 묵묵히 실천하는 기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문화예술과 경영의 만남  메세나 산책


예술로 좋은 일터 만들기
국내 그래픽아트 분야의 작은 거인으로 통하는 성도GL은 문화예술 덕분에 이직률을 확 낮출 수 있었다. 김상래(55) 사장은 여느 중소기업처럼 직원들의 낮은 소속감과 잦은 이직이 큰 고민이었다. 그런데 문화예술 감성과 소통, 이 두 가지를 통해 직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김 사장은 우선 60여 명 직원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장르를 활용했다. 직원들과 함께 시를 낭송하고, 술판 벌이는 회식 대신에 공연 단체 관람을 즐겼다. 6년째 경기도 파주 헤이리오케스트라를 후원해 이제는 헤이리의 대표적 문화 콘텐트로 자리 잡게 했다.
이 공연을 직원과 지역주민, 기업 관계자들과 나눈다. 좋은 문화예술을 직원들과 나누며 소통하자 30% 넘던 이직률이 2%대로 낮아졌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해외 제휴사 대표들도 성도GL의 스토리를 듣고 “이런 회사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다”며 일감을 몰아왔다. 조명기기 회사 필룩스의 노시평 회장 역시 문화예술을 통한 감성경영의 전도사다. 수시로 연주회를 열어 직원이나 이웃주민들과 나눈다.

LG생활건강의 히트 화장품 ‘후(后)’의 한자 서체는 전통악기인 해금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의 방문판매 사원들은 해금을 배운다. 자연스레 해금을 가르치는 국악인들을 후원하고, 해금을 배운 직원들은 제품과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됐다. 좋은 음악을 공유하고, 함께 악기를 배우고, 연극을 더불어 만들고, 하모니를 이뤄가면서 기업들은 딱딱한 경영학 교과서에서 찾기 힘든 감성을 일깨우고 스스로 멋진 오케스트라가 됐다.

예술로 사랑받는 기업 만들기
금호아시아나의 클래식 영재후원 프로그램이 현악기 분야 등의 꿈나무를 조기에 발굴해 육성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졌다. 15년간 1000명 넘는 클래식 영재를 키웠고 이 중 김선욱이나 손열음처럼 세계적 거장으로 커가는 연주자도 적잖다. 이런 일을 주도한 금호문화재단은 이 프로그램에 관한 광고를 내보거나 이를 마케팅에 직접 활용하지 않았다. 고(故) 박성용 명예회장의 유지가 그러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클래식 영재 하면 금호아시아나를 연상한다. 한국을 대표할 만한 메세나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꾸준히 문화예술을 후원해 기업 이미지를 높인 곳이 있다. 기초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이건산업이다. 창업자 박영주(72) 회장은 이건음악회를 1980년 시작해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 왔다. 해외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해 예술의전당 등 전국의 주요 콘서트홀에서 무료로 일반 국민에게 들려주는 행사를 이토록 장기간 해 온 사례는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건음악회가 처음 열린 80년만 해도 이건산업은 인천의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첫 연주는 공장 마당에서 했다. 작업에 지친 공장 근로자들이 이런 공연을 들으려고 몰려들지 미지수였다. 박 회장도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클래식 선율이 귀를 두드리고 속삭이며 지나간 뒤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근로자뿐만 아니라 사업장 이웃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박 회장은 이에 고무돼 2회, 3회를 이어가며 오늘날 23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천의 이건산업 본사를 가보면 하나의 예술품이다. 유걸 교수가 건축한 이 건물은 이건의 귀중한 예술품으로 간주된다. 외관은 물론 실내도 매우 독특하고 유려하다. 건물 자체가 예술작품이라 함부로 내부공사를 하거나 인테리어를 바꿀 수 없다. 직원들은 공연 관람 등 정기적으로 예술체험을 하고 ‘문사철(文史哲)’ 인문학 강좌를 듣는다. 기업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메세나 활동을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과 지속성이다.

예술로 살 만한 세상 만들기
베네수엘라의 빈민가 청소년 예술교육프로그램 ‘엘 시스테마’가 우리나라에서도 뒤늦게나마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소외계층, 소외아동에 대한 예술교육이 이를 치유하는 방편으로 떠오른 것이다. 기업에 이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까지 적잖은 예산과 관심을 예술교육에 쏟기 시작했다. 한화는 이 분야 메세나 활동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 왔다. 지난 3년간 ‘예술 더하기’라는 이름으로 전국 한화 사업장 주변 공부방의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활동해 왔다. 한화 직원들이 직접 이 예술교육 과정에 참여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돈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이 활동에 참여해 보람과 만족을 이끌어낸 성공사례다.

이 프로그램은 시행 초기부터 효과측정 모델을 도입해 3년간 어린이들이 예술교육을 받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추적하고 그 결과를 계량화했다. 이런 시도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 결과를 보면 예술교육을 3년간 꾸준히 받은 우울증 학생 상당 수가 호전됐다. 또 표현력이나 자신감이 늘었고 자신과 주변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됐다. 이 프로그램 과정에서 무대에 선 한 어린이의 말이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아 보았어요.” 그렇다. 박수를 받아본 아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박수를 칠 줄 알게 된다.

많은 기업이 예술교육 효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4년 넘게 지방 초등학교 분교 어린이들을 상대로 예술교육을 하고 있다. 삼성사회봉사단은 전국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상대로 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예술품 경매회사인 K-옥션은 자선경매 수익금으로 어려운 환경의 미술 영재를 발굴하고 있다.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등 응용미술 분야까지 확대할 예정이다.'찾아가는 메세나'도 활발하다. LG연암문화재단은 일선 학교를 찾아 청소년들에게 뛰어난 우리 연극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벽산엔지니어링은 학교를 찾아 재미있는 해설을 곁들인 정통 클래식 공연을 보여주고 있다.예술은 우리 정신을 고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웃 새싹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정서와 창의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기업들에 문화예술 지원은 향기까지 나는 사회공헌활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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