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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대인은 아래를 끌어올려 융평 도모해야

중앙선데이 2012.08.26 00:53 285호 11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박용석
“안철수에게 필요한 척목이라면 역시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인 정당이겠군요. 문제는 급조하듯 창당해 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강권 교수가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아무리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도 조직 없이는 치를 수 없는 게 선거다. 조직 없이 용케 당선됐다고 하더라도 의회의 도움 없이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⑥


“그렇다고 민주당에 입당하는 건 대다수 지지자에 대한 배반이란 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까 그러고 있을 수밖에.”

백두옹이 안철수의 딜레마를 지적한다.
“그래서 안 원장은 민주통합당의 최종 후보가 가려질 때까지는 잠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여간 고역이 아닐 겁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대선 출마를 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요. 본인의 권력의지보다 대중이 선물로 준 리더십의 한계지요. 범야권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안 원장이 중도 하차하면 야권의 타격이 너무 커. 박근혜 후보가 무난하게 낙승하겠지. 그런 낙승은 결과적으로 박 후보를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 만들어 정도령(정도 걷는 대통령) 출현을 어둡게 한다고 봐. 승패를 떠나 안 원장이 완주해야 한국 정치가 거듭나게 돼 있어. 사실 우려는 또 있다네. 안 원장이 잘 버텨 내더라도 민주통합당 후보가 안 원장에게 양보하려 할까?”

“안 원장의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한창 진행 중인 오픈 프라이머리가 흥행하면 양보할 이유가 없겠죠. 민주통합당은 안 원장의 지지를 받아 내려고 할 겁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처럼요.”

“만지면 자꾸 더 커진다는 안철수 현상은 반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반민주당 정서에서도 기인한 거네. 기성 정치인들로는 안 되겠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만들어 낸 대안이란 말이지. 안 원장이 아니면 막강한 박근혜 후보를 상대하지 못할 것이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민주통합당 후보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거나 캠프 안팎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시민들의 열망에 거스른다면 독박을 쓰게 될 겁니다. 부담이 너무 크죠. 1987년 대선 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분열보다 더 가혹한 책임론이 따를 겁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 강 교수의 경고였다. 어쨌든 백두옹이나 강 교수도 모두 박근혜와 안철수의 대결구도를 점치고 있었다.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합창 실현될까
“강 교수!”

백두옹이 짐짓 엄숙하게 강 교수를 불렀다. 강 교수는 대답 대신 백두옹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강 교수는 여야 후보들이 입을 맞춰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나선 걸 어떻게 보셔?”

“후훗!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정치적 레토릭이죠, 뭐.”

강 교수는 코웃음을 날렸다.
“선거용 낱말 장사라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시대적 요청이잖은가?”

“개념부터가 제대로 안 잡힌 용어입니다. 도나캐나 민주화만 갖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마 실현 불가능할 겁니다.”

강 교수는 부정적이었다.
“헌법 조항에도 있는걸? 제119조 2항에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말일세.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헌법에 도입하자고 개헌 제안도 했고.”

백두옹은 책상에 놓여 있던, 해당 헌법 조항이 복사된 종이를 들이밀었다.
“‘경제의 민주화’는 87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돌연 헌법을 고치면서 엉겁결에 들어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용어입니다. 이후로 자그마치 25년 동안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나선 정부는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조차요. 그때도 국회에는 억울한 중소기업가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집권당인 민주당은 외면했어요. 대기업들의 로비에 놀아난 거죠. 경제민주화 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 했어야지 왜 이제야 하겠다는 거지요? 그때 했더라면 정권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니요? 김종인 선대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의 의견 차부터 좁힐 일입니다. 쉽지 않을걸요.”

강 교수의 예단이었다.
“강 교수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꽤 깊군 그래. 이거 드시게.”

백두옹은 은강이가 소반에 담아 막 들여온 수박을 강 교수에게 내민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 국민이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럽니다. 한국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됐지만 그래도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정립된 건 큰 자산입니다. 그런데 법이 있어도 잘 안 지켜지고 강자는 편법, 약자는 떼법을 쓰다 보니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거죠. 저는 그게 유감입니다.”

이로움은 대중이 다 같이 원하는 것
강 교수의 소론에 백두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 교수가 수박을 집어 든 사이, 백두옹은 반닫이에서 흑단나무로 깎은 6효 막대를 꺼냈다. 강 교수가 바투 다가와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백두옹은 6효 막대를 책상에 올려놓고 손(損:)의 괘상을 만들어 보였다. 레고놀이와 흡사했다.
“위는 산(山:), 아래는 못(澤:)!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태니 손해라는 뜻을 지닌 괘라네. 기본이 되는 민중의 것을 박탈해 특권층을 살찌게 하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손실이라는 얘기야. 손 괘상을 180도 돌리면 반대의 경우가 되겠지.”
이번에는 익(益:)의 괘상이 됐다.
“위는 바람(風:), 아래는 우레(震:)!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니 이익이라는 뜻을 지닌 괘가 돼. 많이 가진 쪽에서 덜어 적게 가진 쪽에 보태니 백성의 기쁨이 한이 없는걸세. 대중의 경제적 공익성과 사회적 평등을 나타내는 괘상이야.”
“이거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손익계산서네요!”

강 교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주역' 41번째의 손괘, 42번째의 익괘를 붙여 손익계산서를 이끌어 내는 순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자학은 양반이라는 특권층의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라고 믿어 왔던 그였다. 근대화 시기 유교 망국론이 나왔던 것도 바로 그래서가 아니던가.“부당함을 바람처럼, 혹은 번개처럼 빨리 바로잡으면 천하를 유익하게 하는 도가 되지만 박탈이 심해지면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네. 주역 철학은 그걸 엄중히 경고하고 있어. 사자성어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출전이 이 대목이야.”

백두옹은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돋보기를 썼다. 그러더니 곧 한적(漢籍)으로 된 경전을 펼쳐 보였다. 그는 강 교수에게 익괘 효사와 주석을 꼼꼼히 해석해 줬다. 봉건시대 대표적인 보수파 정자와 주자의 견해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로움은 대중이 다 같이 원하는 바이니 특권층이 사사로운 이익에 눈멀어 대중에게 손해를 끼치면 공격할 거라는 주장이었다.
“주역이 이렇게 무서운 철학이로군요. 뉴욕 월가의 점령시위가 떠올라요.”

강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그렇게 놀라서 어떡하누? 주역은 언제나 특권층이 아니라 소수자·약자 중심이야.”

서민의 눈물과 땀 닦아주는 이가 대인
안경 너머로 강 교수의 낯빛을 살핀 백두옹은 서가에서 다른 책을 찾아왔다.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였다. 봉사란 상소문을 가리켰다. 백두옹은 1574년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1만2000여 자의 상소문 한 부분을 읽고 해석했다.기묘사화보다 참혹한 을사의 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은 숨을 죽이고 눈치나 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감히 국사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권세 높은 간신의 무리가 마음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구법(舊法)이라 하여 준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신법(新法)이라 하여 혁파하였으니, 그 결과는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손상되어 가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털끝만큼이라도 생각했겠습니까.

백두옹은 붓펜으로,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운다는 뜻의 ‘박민자비(剝民自肥)’를 썼다. 율곡은 주역 손괘의 상황을 바탕으로 깔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함을 바로잡아 안정되고 평화로운 대동(大同)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민중의 불만은 적어지겠지만 하향 평준화가 되는 거잖습니까? 재벌들이 망하면 좋아할 사람들 많을 겁니다. 나라도 같이 어려워지는 건 생각지도 않고요.”
강 교수가 군중심리의 본질을 지적했다.

“그걸 누가 못해? 위를 끌어내릴 게 아니라 아래를 끌어올려 높은 단계의 평준화, 곧 융평(隆平)을 도모하는 게 어렵지. 그래서 북악 산신이 나한테 단단히 이른 거네. 다음 대통령은 함량 미달인 자, 개인적인 탐욕을 가진 자가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렇고 그런 소인배가 아니라 대인이 뽑혀야 정도령이 되지.”
백두옹은 얼마 전, 인왕산 산책로에서 겪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르신께서는 속된 정치인들을 대인으로 보세요?”
강 교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물론 세종대왕쯤은 돼야 대인이지. 박근혜·안철수·문재인·손학규·김두관·정세균 후보 모두 품성은 두루 좋은 사람들 같아. 적어도 꼼수 쓰는 소인배는 아니란 말일세.”
“저는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서민들이 흘린 눈물과 땀을 닦아 주는 이가 대인이라고 봐요. 가령 남수단의 이태석 신부나 전주 노송동의 얼굴 없는 기부천사, 두 평짜리 쪽방 셋집에 살면서 5년간 40t의 쌀을 이웃에게 기부한 경기도 양주의 50대 아저씨 같은 분들이 진정한 대인이 아닐까요?”
정치는 성자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강 교수는 딴죽을 걸었다. 백두옹은 경전을 다시 펼쳤다. 혁명(革命)을 뜻하는 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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