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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최종 배상액, 한국계 판사 루시 고 손에 달려

중앙선데이 2012.08.26 00:31 285호 3면 지면보기
“평결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된다.”
24일(현지시간) 발표된 배심원단 평결에 앞서 담당 판사인 루시 고(Lucy Koh·43)가 내뱉은 말이다. 그는 “이번 재판의 다툼 내용이 워낙 까다로워 배심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앞서 15일에는 “이제 화해할 시간 아니냐”며 두 회사 소송 책임자끼리 전화 협상 한 번 더 해 보는 게 어떠냐고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협정은 결국 없었다. 9명의 배심원단은 삼성전자가 아이폰과 아이패드 기술을 모방했으며 그에 따른 애플 피해액 10억4934만 달러(약 1조1910억원)를 삼성이 배상하라고 결론지었다.

세기의 특허 소송, 주목받는 인물들


이제 공은 고 판사에게 넘어왔다. 고 판사가 배심원단의 결정을 그대로 따른다 해도 중대한 결정이 남아 있다. 삼성전자가 애플의 특허를 고의로 침해했다는 결론이 난 이상 삼성전자가 물어낼 배상금액을 최종결정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평결 금액의 세 배까지 물릴 수 있다. 자칫 애플의 변호사 비용까지 내라는 판결이 나올 수 있다. 이 밖에 특허를 침해했다고 인정된 제품은 판매금지를 시킬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진행되는 두 회사 간 특허 분규에 미칠 영향까지 감안하면 고 판사는 향후 이동통신단말기의 판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판이다.

루시 고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공교롭게 한국 간판기업이 당사자인 대형 송사의 재판 책임자라는 점에서 우려도 있었지만 현재까지 기우로 판명됐다. 그는 꼼꼼한 데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번 소송이 세계의 주목을 받자 배심원들에게 “객관적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이 사건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2006년 변호사 시절, 애플이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한 회사의 소송을 맡아 1억 달러 승소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루시 고가 이번 재판 과정에서 쏟아낸 ‘독설’도 화제가 됐다. 삼성전자가 법정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 자사 휴대전화 ‘F700’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자 그는 “법원에서 연극이나 쇼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지난 16일에는 애플이 최종심리 직전 느닷없이 22명의 증인 명단이 적힌 리스트를 제출하자 변호인에게 “마약을 하지 않은 이상 이 증인들을 다 법정에 세우겠다는 이야기냐”고 호통치기도 했다.

그의 한국 이름은 고혜란이다. 미 워싱턴DC에서 태어나 1993년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를 받았다. 이후 미 상원 사법위원회, 법무부 특별보좌관, 연방검사, 로펌 변호사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2008년 그를 주 샌타클래라 최고법원의 판사로 지명했다. 2010년부터 지금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연방 지방판사다. 남편은 멕시코계인 스탠퍼드대 법대 교수로 법조 부부다.

최지성·팀 쿡의 설전도 가열
이번 특허소송은 양측 최고사령탑인 최지성 부회장과 팀 쿡 최고경영자(CEO) 사이의 대결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법정까지 가기 전에 두 사람은 직접 만나기도 하고 전화도 하며 합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최 부회장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 이건희 회장에 이은 2인자다. 애플과의 소송이 시작된 지난해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지내 이번 소송의 삼성전자 측 대표가 됐다. 21일 열린 양측 변호인단 최종변론에서 애플 측은 “아이폰의 가장 열렬한 팬인 삼성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제품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애플의 팀 쿡은 지난해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사망 이후 회사 경영과 함께 특허소송을 이끌어 왔다. 지난 4월 투자자들에게 실적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소송을 늘 싫어했고 앞으로도 싫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언 당시 삼성과 화해를 하려는 제스처가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지만 이후 삼성과의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강경한 태도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이 우리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고 격한 어조로 비난하기도 했다. 쿡이 이번 소송을 치르면서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등 잡스 없는 애플이 순항할 수 있다는 확신을 회사 안팎에 심어 줬다고 외신들은 평가했다. 그래서 쿡의 발언과 달리 애플이 처음부터 삼성이란 경쟁업체를 표적으로 삼아 특허와 사업영역의 울타리를 높게 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공교롭게 이번 평결이 나온 24일은 그가 잡스의 뒤를 이어 애플의 CEO가 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엔지니어 배심원 많아 신속 평결
지난주만 해도 배심원들이 평결을 쉽사리 내지 못하고 연기할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비전문가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판단해야 할 항목만 36가지나 됐기 때문이다. 실제 루시 고가 배심원들에게 소송과 관련된 법조문 등을 설명하기 위해 나눠 준 자료만 100쪽이 넘었다. 배심원들에게 그냥 읽어 주기만 해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분량이었다. 미 법정 운영의 특징인 배심원제는 법조인이 아닌 일반 시민이 재판 혹은 기소 과정에 참여해 사실관계와 유무죄, 또는 민사상 문제를 판단하는 제도다. 해당 법원이 위치한 주에서 무작위로 뽑아 구성한다. 이번 소송에는 사회복지사·엔지니어·가정주부·무직 비디오 게임팬 등 9명의 배심원이 참가했다. 74명의 후보 중에 루시 고가 개별 인터뷰를 통해 두 회사와 상관없다고 판단되는 10명을 뽑았다. 하지만 “배심원에게도 보수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여성을 탈락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예상과 달리 사흘 만에 평결이 마무리된 배경에는 엔지니어 출신 배심원들의 역할이 컸다는 후문이다. 배심장을 맡은 이는 컴퓨터회사에서 35년 동안 일한 베테랑이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특허를 취득하기 위해 변리사들과 7년간 합심한 경험이 있다. 취미가 특허 취득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2명이 엔지니어였다. 이들의 전문성이 다른 일반 배심원들의 판단에 영향을 줬고 비교적 빠르게 평결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배심원제가 논리적인 근거보다 감성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근거를 들어 비판하는 쪽도 있다. 특히 최첨단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특허소송의 경우 일반인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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