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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 글 읽어본 적 있나요

중앙일보 2012.08.21 03:00 종합 8면 지면보기
대입 인문계 수시 논술전형을 준비 중인 서울 강남구 A고의 이모양은 올해 치러야 할 논술시험을 떠올리면 불안해진다. 이양은 “전교 상위권을 유지해 왔지만 대학 기출 문제들을 보면 제시문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앵거스 그레이엄, 제임스 레이철즈, 윌 킴리카, 차드 한센 … 전공자들도 깜깜
대입 논술이 너무해 <중> 대학원생 수준 인문논술

 지난해 논술을 치른 대학 1학년에게도 ‘논술의 공포’는 생생하다. 연세대(인문계열) 1학년 김모(19)씨는 지난해 11월 서강대 논술에서 제대로 글을 쓰지도 못해 낙방했다. 앵거스 그레이엄(동양철학), 제임스 레이철즈(도덕철학), 윌 킴리카(정치철학) 등 처음 들어보는 학자들의 인용문이 나왔다. 김씨는 “논술시험인지 독해시험인지 분간이 안 갔다”고 말했다. 그가 치른 연세대 논술 지문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방의 법칙’, 2006년 사이언스 논문 등이 나왔는데 하나같이 생소했다.





 대입 논술이 대학원생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문들로 출제돼 수험생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고교에서 배운 내용을 점검하고 대학 수학에 필요한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당초 취지를 벗어난 것이다.



 지난해 서강대 인문논술은 짧고 어려운 내용의 글이 여러 개 인용됐다. 수험생은 2시간 안에 10개의 지문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일부 번역 지문은 난해하거나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비문(非文)이 섞여 있었다. 차드 한센의 ‘고대중국의 언어와 논리’를 번역한 인용문은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권영민(국문학) 단국대 석좌교수는 “비문이 많고 내용도 고교생이 읽기엔 전문적인 글”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이욱연 서강대 입학처장은 “원문을 가공하지 않고 인용했기 때문에 지문이 어려울 수는 있다”며 “각각의 지문이 생소하더라도 논술 주제가 고교 교과과정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본지가 미국 사회학자의 SSCI(사회과학논문색인)급 논문을 영어원문 그대로 인용했던 이화여대의 문제를 대학원 사회학 전공자들에게 보여주니 고교생 실력으론 독해가 어렵다는 반응이 나왔다. 김종우(성수고 교사) 진학교사협회장은 “어려운 영어지문을 논술에 출제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닌 영어실력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이 지문을 어렵게 출제하다 보니 수험생들은 한 번이라도 읽어본 것이 나오면 ‘로또’라고 말한다. 수험생들이 학원으로 몰리는 이유 중 하나다. 학원에선 유명 학자의 저서와 주요 개념 등을 ‘묻지마’ 식으로 외우게 하며 돈을 번다.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는 대신 암기와 요행을 가르치는 셈이다. 그 결과 수험생들의 답안지는 ‘판박이’가 된다.



 취재팀이 성균관대(양정호 교수 연구팀)와 이 대학 2012학년도 인문계 수시논술 답안지 2만5000장 중 1500장을 무작위로 골라 분석해 보니 절반 정도가 비슷한 논지와 글감으로 글을 전개하는 판박이였다. 성균관대는 “학원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의 답안이 획일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판박이 답안들은 논지와 상관없는 단어나 개념을 맥락 없이 쓰고 있었다. 양정호(교육학과) 교수는 “학원에선 ‘존재=니체’ ‘자살=뒤르켕’과 같은 식으로 논술을 암기과목처럼 가르치는 것 같다”며 “사교육에 길들여진 수험생의 답안은 기본적인 구성력이 부실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유홍준 성균관대 논술출제위원장은 “무죄 추정의 원칙, 복지병, 시장 실패 등 주제와 상관없이 개념적인 단어들이 등장하는 건 학원에서 외운 내용으로 보여 감점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중앙일보·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기획

◆특별취재팀=성시윤(팀장)·천인성·윤석만·이한길·이유정 기자, 박소현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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