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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영어 잘하지 못해서 고마워!

중앙일보 2012.08.21 00:41 종합 32면 지면보기
조화유
재미 칼럼니스트·소설가
미국서 태어난 우리 집 막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다니러 오신 할머니에게 밤에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를 하라고 시켰더니 “할머니 안녕히 죽으세요”라고 해서 온통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이렇게 우리말 발음이 서툴던 아이가 지금은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우리말도 곧잘 한다. 이 아이 위로 한국서 태어나 다섯 살과 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온 남매가 더 있다. 모두 성장해 집을 나가 살고 있어 한국어를 쓸 기회가 전혀 없는데도 우리말을 곧잘 하는 것은 순전히 제 엄마 덕이다.



 우리 집사람은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말만 했다. 아이들에게 한국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겠다는 거창한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영어를 유창하게 못하니까 아이들과 우리말로 대화하는 게 훨씬 편해서였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엄마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상 생활회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이들이 아는 우리말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아 깊은 대화는 나누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이들이 예컨대 문화나 정치, 사회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는 아버지인 나한테 영어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아이들에게 우리말로만 대화를 해서 아이들의 한국어 능력을 더 높여줄 것을 하고 후회를 한다.



 내가 쓴 소설이나 수필, 그리고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우리 아이들도 읽게 하고 싶지만 아이들 한국어 실력으로는 50%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래서 꼭 읽히고 싶은 작품 몇 편을 골라 영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영어판은 한글판의 맛을 다 전달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 아끼는 단편소설 ‘다대포에서 생긴 일’은 부산 사투리와 평안도 사투리가 일부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사용돼 소설의 재미를 더하고 있는데, 사투리의 묘미를 영어로는 전달할 수가 없으니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나 자신의 회고록도 출판하게 되면 나의 아이들을 위해 영어로도 써야 할 것 같다.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세 아이들이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것이 기특하고 대견하다. 특히 한국 경상도에서는 살아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엄마(경북), 아빠(경남)의 고향 말투와 사투리를 쓰는 걸 보면 재미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기가 찬다” “같잖다” 같은 말을 할 때는 웃음이 절로 난다. 아이들은 또 불쌍하거나 애처로운 것을 보면 “딱하지!”라고 말하는데, 제 엄마가 그 말을 자주 쓰기 때문이다.



 많은 재미동포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 간의 대화 단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민 1세들은 먹고살기 바빠 어린아이들만 집에 두고 부모는 직장에 나간다. 자연히 대화시간이 없어 우리 말로는 기초적인 몇 마디밖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밥 먹어라” “학교에 늦겠다” “문단속 잘해라” “집에 와 공부해라” 등등. 그러다 보니 2세들은 한국어를 거의 못하고 영어만 하게 된다.



 결국 사고방식도 미국화돼 부모와 의견 충돌을 빚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부모들은 아이들한테 화가 나면 한국어로 소리를 질러대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세탁소를 여러 개 운영하는 한 동포가 내게 하소연했다. 그가 공부는 하지 않고 돈 쓸 궁리만 하는 아들 때문에 화가 나서 “저 자식 싹수가 노랗다!”고 했더니 아들이 “Dad, my socks are not yellow.”(아빠, 내 양말은 노란색이 아니에요)라고 하더란다. 그는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 아이들은 제 엄마 덕분에 우리말도 곧잘 하고 바르게 커줘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집사람에게 “영어를 잘하지 못해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다. 집사람이 영어를 유창하게 했더라면 아이들과도 영어로 대화를 더 많이 했을 것이고, 그러면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화유 재미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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