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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나요, 내 그림 속 우주

중앙일보 2012.08.21 00:15 종합 26면 지면보기
‘푸른 나선’(1975) 앞에 선 한묵. 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2차 평면에 4차원의 우주 질서를 담겠다는 야심을 갖고 기하추상을 그렸다. [사진 갤러리현대]


고개를 외로 꼰 얼굴 없는 사람. 그 앞에는 흰 밥그릇, 뒤에는 창살이 있다. 크지 않은 이 유화의 제목은 ‘흰 그림’(1954), 그린 이는 재불화가 한묵(韓默)이다. 세상 나이로 올해 백수(白壽·99세)다.

백수 맞은 재불화가 한묵, 신사동 갤러리현대서 개인전



 1914년 서울서 태어난 그는 18세에 만주로 건너갔고 26세에 도쿄에서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38선 이북 금강산 일대에서 그림을 그리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종군화가로 활동, 52년 장욱진·송혜수와 ‘종군 스케치 3인전’을 열었다.



 잡지 ‘신태양’의 표지화(1958)로도 세상에 알려진 ‘흰 그림’을 그는 “내 자화상”이라고 불렀다. 38선을 내려와 오갈 데 없고 어찌할 바 모를 답답한 심정을 담았다는 설명이다. 55년 김환기 당시 홍익대 미대 학부장의 추천으로 미대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됐다. 만년의 이중섭(1916∼56)과 정릉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61년 교수직을 버리고 홀연히 프랑스로 건너갔다. 청소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 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충격을 받고 3년을 끙끙 앓은 뒤 소용돌이 모양이 역동적으로 뻗어 나가는 원색의 그림을 그렸다. 당시 “어디가 끝인지 알 수도 없는 무한한 우주 속에 살면서 그 우주공간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적었다.



 한묵 개인전이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22일부터 열린다. 전시를 맞아 노화가가 서울에 왔다. 그는 2000년 심장 수술 이후 거동이 불편해 서예 외에는 이렇다 할 작업을 하지 못했다. 이중섭도 가고, 김환기도, 장욱진도 먼저 갔다. 살아 남은 그는 2003년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전시에 초대돼 “저 파도를 보면 중섭이가 ‘어 왔느냐’며 손을 흔드는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을 울렸다.



16일 전시장서 만난 그에게 ‘100세를 앞두고 있는데, 화가로서 행복했느냐’고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화가는 종이에 써서 건넨 질문을 큰 소리로 읽고는 이렇게 답했다. “난 나이를 잊어버리고 있소. 현재 내가 살고는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사람이거든. 모두 다 죽은 사람이거든요, 우리가. 죽음 가운데 있고, 그러면서 산다고 봐야 해요. 때가 오면 가는 거에요. 심각할 거 없어요.” 부인 이충석(81)씨는 “선생은 ‘붓대 들고 있다 씩 웃고 간다’고 말하길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파리 기메 국립아시아 미술관 피에르 캄봉 수석 큐레이터는 “한묵의 화폭은 형태와 기하학의 세계이지만, 그 구성은 인간성, 시(詩), 생기, 미래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전시는 9월 16일까지. 캄봉을 비롯해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박고석 화백, 이지호 대전 이응로미술관장 등의 평문이 수록된 그의 첫 화집(마로니에 북스)도 출간된다. 02-5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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